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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출장, 현지 뉴스에 왜 내가?

코로나 전에 다녀온 해외출장의 기록

by 마리


나에게는 여러 개의 구글 계정이 있다.


오래전부터 쓰던 계정은 용량이 다 차서 계정을 새로 몇 개 더 만들었었다. 그리고 이전 계정은 잘 들어가 보지 않게 되었다. 퇴사를 하고 발가락을 다쳐 집에 있던 어느 날,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옛 이메일 계정을 우연히 클릭하게 되었다. 예전 메일들을 읽으며 내가 이때 이런 메일을 주고받았구나 하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구글 드라이브의 포토 버튼으로 손가락이 움직였다. 버튼을 누르자 이게 웬일인가, 잃어버리고 없어졌다고 생각한 과거의 사진들이 나타났다.


사실 얼마 전부터 옛날에 찍은 사진들을 다 날렸다고 생각해 서 미리 다른 곳에 저장을 해둘걸, 하고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진들이 구글 드라이브에 나도 모르게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적도기니에 도착해서




아프리카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세계지도를 펼쳐보니 적도기니라는 나라가 정말 아프리카 대륙 왼쪽 중간에 있었다. 적도기니라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말라리아병에 걸릴 수 있다고 해서 병원에 가서 황열병 주사를 맞고, 모기 방지 스프레이도 챙겼다. 하지만 말라리아도, 모기 따위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답답한 사무실에서 벗어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떠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신이 났다. 비행기를 타고 빨리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적도기니에 도착해서 2주 동안 있으면서 매일 한 일은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기였다. 아프리카에 가면 당연히 사자도 보고 코끼리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허허벌판인 도시에 우뚝 세워진 어느 호텔에서 하루 종일 머물며 매일이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버물리와 모기 퇴치용 스프레이, 그리고 현지에서 산 생수


허허벌판의 호텔 창문 밖 풍경


매일 기다리고만 있던 호텔 로비




오전에 있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조식을 먹고 준비를 하고 로비로 내려가면 누군가가 와서 일정이 오후로 연기되었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다시 대기를 하고 있으면 그날 미팅이 취소되거나 내일로 연기되었다. 처음 며칠은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하려 했지만 일주일이 넘게 그런 일은 계속 반복되었고 아무 데도 못 가고 호텔에만 갇혀있다 보니 점점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현지 관계자분이 갑자기 미팅이 잡혔다며 빨리 준비하고 나가자고 했다. 우리 일행은 깜짝 놀라 잽싸게 준비를 하고 차를 타러 갔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적도기니는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를 공동으로 쓰는 나라인데 나는 일행의 스페인어 통역을 해야 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데 손에서 땀이 나고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차를 타고 이동 중 찰칵


내가 여기 지금 왜 있는 거지?



매일 회사에서 번역만 하다 출장을 오게 돼서 기뻤지만 이런 중요한 미팅에 전문 통역사가 아닌 내가 감히 통역을 할 자격이 있을까?라는 생각에 손에 땀이 나고 입이 바싹 말라왔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비서가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심장박동수가 빨라지기 시작해 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나는 준비해 간 자료와 노트를 펼쳤다. 드디어 관계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적도기니와의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많은 해외업체들이 저 분과의 미팅을 하기 위해 줄을 선다고 하는데 이 정도 기다렸다가 만난 것은 양호한 케이스라고 했다.



적도기니 말라보의 거리 모습



회의가 시작되었고 내가 스페인어로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분의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긴장이 되었고 내가 말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불안했다. 그분이 한 손을 턱에 괴고 고개를 끄덕끄덕이며 내가 하는 말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느끼자 안도가 되었다. 한국말을 스페인어로 통역하며, 스페인어를 한국말로 통역을 하는데 탁구공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었다. 긴장감 가득했던 회의는 30분 만에 끝이 났다.



다음 날 연속으로 우리는 적도기니의 다른 관계자들과의 두 번째 미팅을 할 수 있었다. 회의실을 나오면서 휴, 이제 끝났구나라고 생각하던 찰나, 갑작스러운 플래시 라이트에 눈이 부셨다. 적도기니 방송국에서 한국 관계자분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하며 우리에게 마이크를 댔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또 기계적으로 통역을 하고 있었다.


정신없는 하루를 마친 다음 날 아침, 호텔방에서 티브이를 켰는데 익숙한 얼굴이 화면에 나왔다.


적도기니 뉴스에 어제 찍은 인터뷰 화면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통역을 하는 나의 모습이, 내 목소리가 그대로 방송에 나가고 있었다. 순간 어디로 숨고 싶었다. 하지만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핸드폰으로 뉴스 화면을 찍기 시작했다. 다행인지 아닌지 몇 분 간격으로 인터뷰 영상이 계속 나와서 녹화를 할 수 있었다.


내가 이런 방에 머물렀었구나. 책상위는 이때도 정신없었네





정리정돈에 약하고 기계치인 나는 핸드폰을 바꾸면서 내가 찍은 사진들을 따로 저장을 안 했었다. 그런데 구글 드라이브에서 사진들을 발견한 순간, 심장이 요동쳤다. 그리고 사진들을 한 장씩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특히 해외출장을 다니면서 새로운 풍경을 만날 때마다 감탄을 하며 셔터를 눌러댔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회사를 다닐 때 이런 시간도 있었구나. 글로벌 커리어우먼이 되어 세계를 오가는 나를 꿈꿨지만 현실은 퇴사와 이직을 반복하며 상상 속의 그런 멋진 모습이 아닌 나를 보며 실망을 했었다.




코로나 때문에 해외여행을 못 가는 요즘, 몇 년 전 사진들을 보니 회사생활을 하면서 나쁜 기억만 있었던 건 아니었구나 싶었다. 오래전 일이라 인터뷰 영상도 잊고 있었는데 구글 드라이브 포토 덕분에 다시 이 영상을 보게 되었다. 엄청 긴장하고 두려웠던 순간이었지만 지금 내게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기다리다 지치면 유일하게 나갈 수 있었던 호텔 뒷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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