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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Nov 10. 2023

그 사람이 안 나와서 다행이야


오후 9시가 되기 전, 노트북의 카메라를 켰다.


화면 속 내 얼굴이 어떻게 나오나 궁금했다.


헉, 보자마자 안 되겠다 싶어서 파우치 속에서 연분홍빛 립스틱을 꺼내 발랐다.


안색이 훨씬 나아 보였다. 입고 있던 티셔츠에 까만색 정장재킷을 걸치니 그럭저럭 준비가 끝났다.


9시 5분 전, 떨리는 마음으로 링크에 접속을 했다. 그리고 상대방이 접속하기만을 기다렸다.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은 언제나 긴장이 된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데 평소보다 거리가 한산했다.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카드를 찍고 플랫폼에 도착했는데 전광판에 곧 열차가 도착한다는 표시가 떴다. 역내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텅 빈 지하철역을 바라보는 순간, 기분이 너무 짜릿했다.


속으로 "야호!"를 외쳤다.







이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칠레와 화상미팅이 잡혀있었다.


저녁에 하는 미팅이어서 마음이 살짝 부담이 되었다. 눈치를 보다가 5시쯤 사무실을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 평소 붐비는 지하철역이 너무 한산했다.


매일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한 지하철을 타는 게 스트레스였다. 사람들 틈에 끼여 이리저리 밀릴 때마다 숨이 턱 막혔다.


이걸 언제까지 반복해야 하나, 지하철역을 향할 때마다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아 헤매었지만 별 수 없었다.








오후 9시 정각이 되었다. 담당자가 접속하기만을 기다렸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났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시간을 잘못 계산했나? 시차를 다시 확인해 보았지만 칠레는 아침 9시, 한국은 밤 9시가 맞았다.


15분이 지났을 즈음, 안 되겠다 싶어서 지금 미팅룸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아무 회신이 없었다.


갑자기 기분이 너무 안 좋았다.


이날 약속을 잡기 전, 담당자는 몇 번이나 날짜와 시간 바꾸기를 반복했었다. 이 업체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전혀 없는 사람이구나, 이 미팅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구나.


그럼 할 수 없지. 몇 분 더 기다릴까 하다 그냥 방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한 시간 후, 메일이 도착했다.


담당자가 미안하다면서 미팅을 내일 9시로 바꿀 수 있냐고 물었다.


허허 웃음이 나왔다. 아니 도대체 이 사람은 자기가 뭐길래 마음대로 시간을 바꾸나, 나는 뭐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다 맞춰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싶었다.







립스틱을 티슈로 지우고 걸치고 있던 검은 정장재킷을 벗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긴장이 확 풀렸다.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은 담당자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이 올라오던 찰나,

여유로웠던 퇴근길이 떠올랐다.



비록 미팅은 못했지만 이 사람 덕분에 오래간만에 사람들 틈에 끼이지 않고 퇴근할 수 있었으니

휴, 그래 그것만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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