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중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칠레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
너무 신기했다. 한국에는 한여름이 곧 시작되려고 하는데 그곳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다니.
일찍 만난 가을이 반가웠다.
담당자와는 내가 머물고 있는 호텔 로비에서 오전 9시에 만나기로 했다. 전날 늦은 저녁에 도착해서였는지 잠을 깊이 못 잤고 시차 때문에 몽롱한 상태로 아침을 맞았다.
산티아고 시내가 다 보이는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맛있게 먹은 후 옷을 갈아입고 1층 로비로 내려갔다. 멀리서 많이 본듯한 얼굴이 보였다.
나와 1년여 동안 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칠레 담당자였다. 그녀가 나를 보자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나는 사실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다. 하지만 남미 사람들과 있으면 이런 나는 갑자기 무장해제가 되어버린다.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그들 특유의 밝고 명랑한 에너지가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버린다. 스페인어라는 언어가 주는 힘인 것 같다.
하긴 우린 처음 만났어도 1 년간 업무 상 연락을 해오긴 한 관계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도 최대한 하이톤으로 올라! (스페인 어로 안녕이라는 뜻)를 외쳤다. 그리고 서로 볼을 맞대고 남미식으로 인사를 했다.
이 칠레 업체는 다른 남미 거래처에 비해 이메일을 보내면 답변이 바로 오고 연락이 바로 되었던 굉장히 성실한 고객사였다. 메일로만 업무를 하다 얼굴을 보고 얘기하니 회의는 더 빨리 진전이 되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또 이렇게 미팅만 하다가 한국으로 가겠구나 싶었다.
사실 출장을 떠나기 전 회의실로 불려 가 실적에 대한 협박 같은 압박을 받았었다. 입사한 지 1년 차였다.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으로 이동을 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나의 열정에 비해 실적은 빨리 따라와 주지 않았다. 나는 보통의 영업사원처럼 외향적이거나 활달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관리자가 직원에게 기대하는 것과는 반대로 나는 다른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지도 못했다. 자존심은 강해서 혼자 묵묵히 일에만 집중하자는 주의로만 회사생활을 해나갔다.
하지만 회사생활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때론 나의 성향을 바꿔가며 가면을 쓰려고도 했지만 자괴감만 커갔다.
이런저런 생각이 불쑥 나타나 그녀와의 회의에 온전히 집중을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적막한 사무실을 벗어나 활기찬 분위기에 있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눈치 볼 사람도 없고 일에만 집중하니 오랜만에 살 것 같았다. 다행히 미팅은 잘 끝났고 우리는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주위를 산책하기도 했다.
산티아고의 가을은 참 이뻤다.
산티아고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 환승을 하던 중 갑자기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안녕! 사실, 네가 칠레를 방문하기 전 우리는 너희 회사와 A건에 대해 계약을 하기로 이미 결정을 했었어. 그런데 마침 네가 출장을 온다고 해서 기다리기로 했어. 그러니까 네가 칠레까지 왔는데 한국으로 돌아갈 때 좋은 결과를 가져가면 좋을 것 같아서 지금 계약 소식을 전하는 거야"
그녀는 계약서를 첨부하여 보냈으니 메일을 확인을 해달라고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서둘러 메일함을 열어보았다. 정말 싸인을 한 계약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사무실에 빈손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 자신을 자책하며 내 능력을 의심하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에게 너무 고맙다고 답장을 했다.
계약서를 한참 동안 보고 또 바라보는데 손이 바들바들 떨렸고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게 뭐라고.
어찌 되었던 나의 첫 계약서를 손에 쥐고 설레는 마음으로 사무실에 복귀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절대 나 자신을 바닥으로 몰고 가지 않을 것.
내가 하는 일에 믿음을 가지고 걷다 보면 어떻게 해서든 그 결실이 내 옆에 조금이라도 가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