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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바다거북 Nov 06. 2019

사람을 세우기 위해 정말로 필요한 것

복지현장에서의 선교활동에 대하여

복지현장, 구호현장에서 선교를 하지 말라. 그것이 당연한 요구라고 생각했었다. 

스스로 신앙인이 되고 직간접적으로 이런저런 복지현장과 구호단체에 참여하게 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절박한 사람들에게 빵을 미끼로 신앙을 파는 것, 혹은 빵을 대가로 종교적 행위를 강요하는 것, 그것은 너무 저질이고 천박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요즘은 그런 시선이, 지극히 현장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후원자들, 또는 제3자들은 막연한 이상과 관념으로만 복지단체, 구호기관들을 바라본다. 

내가 돈을 줄테니 너는 알아서 이들을 잘 구해보라고.


그러나 현장에서 절실히 부딪치는 문제는 돈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의 부서진 마음이다.

물질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마음이 굽어진 사람들은 스스로 설 힘이 없다.

TV에서야 착한 주인공들이 친절을 조금 베풀고 따뜻한 밥 몇 끼 같이 먹고나면 금방 사람들이 마음문을 열고 내적 치유가 일어나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은 만만치 않다.

고작 그런 인간적 노력 - 사실 그것조차도 정말 쉽진 않지만 - 으로는 그 마음 속 깊은 곳의 트라우마와 고통, 좌절감과 낙망, 패배주의와 우울감이 해결되지 않는다.


신앙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교육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머리로는 다 알고 이해해도 마음에 힘이 없어서 그렇게 삶을 살아낼 수 없는 사람들에겐, 교육 그 자체만으로는 힘이 없었다.

사랑을 쏟아붓지만, 인간의 사랑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깊은 내면의 문제는 그 사람이 스스로 붙드는 신앙만이 치료할 수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고백이기도 했다.

흔한 IMF 세대로서 빚더미 속에서 자란 내게 대한민국의 훌륭한 복지 시스템과 장학 시스템은 무상 급식과 양질의 고등교육을 제공해주었다. 시스템이 닿지 않는 부분을 사비와 시간을 들여 배려해 주시던 좋은 어른들도 많았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 덕에 좋은 직장을 얻었고, 스스로 생계를 꾸릴 수 있게 되니 영원할 줄 알았던 가난은 금방 옛일이 되었다.

그러나 부서진 내면은 다른 문제였다. 겉으로는 좋은 대학을 나와 멀쩡한 직장을 다니며 남부럽지 않은 삶을 꾸리고 있는 사람이, 성장기에 뒤틀린 정서로 인해 내적으로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학대하며 하루하루 견뎌내고 있었던 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 결국 오랜 시간에 걸쳐 신앙 안에서 치유되어야만 했던 영역이 있었다. 그것은 또다른 의미에서 절박한 생존의 문제였다.


"단지 가난이 문제가 아니야. 그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게까지 시들어버린 건, 꼭 가난해서만은 아니야. 그냥, 햇살이 필요해. 계속해서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 그러면 시든 식물이 살아나는 것처럼 점차 살아나겠지. 태양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공평하게 햇살을 주잖아."

오랫동안 사회복지 업무를 해온 친구가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어떤 인간이 태양같은 햇살을, 그런 압도적인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 없이 물질로는 무너진 삶을 구원할 수 없다. 그러니 당연히 사랑을 쏟는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쏟아주는 사랑으로도 그 삶을 일으키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그러므로 사람의 능력이 닿지 않는 내면 깊숙한 곳, 그곳에 신앙이 닿아 회복될 수 있기를,

그래서 죽지 않고 살아남기를,

생존을 넘어서 스스로의 생을 행복하게 축복으로 여기며 살아갈 힘을 얻기를,

그럴 가치 있는 생임을 스스로 긍정할수 있게 되기를,

이 땅의 모든 생들이 당연히 누려야 했던 것들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바라며 최선을 다할 수 밖에는 없다.


그 마음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을 갖지 말고 어느 선까지만, 정해진 역할만 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신앙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내심의 영역이고 물리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인 교육이나 행위의 강요로 신앙을 전할 수 없다. 그것은 상식이다.

설령 누군가 신앙의 의지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믿음이 생기는 것은 또 다른 은혜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신앙을 전하는 것 자체가 만병통치약이 될 순 없다. 그건 현장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안다.


다만, 여기 이렇게 아슬아슬한 인생들이 있기에, 할 수 있는 마지막 최선까지 다해보는 것일 뿐이라는 걸, 이제 이해한다. 그 절박하고 고귀한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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