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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바다거북 Feb 08. 2023

무력감에 관한, 부끄러운 기억


종종, 내 뜻과 다른 취지로 서면을 작성해야 할 때, ‘양심의 자유에 반하는 글쓰기’라는 식의 농담을 한다.

그러나 농담은 농담일 뿐이고,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고 느끼는 사건들은 종종 있어도, 실상 정의에 현저히 반한다는 느낌의 일을 했던 적은 없다.

밖에서 보이기야 얼마나 대단해 보이든, 말단 사무직의 형편은 어디든 다르지 않아서 여기서도 자조적으로 ‘노예’라고 스스로를 폄하하며 농담도 한다.

그렇지만, 노예의 의견 따위를 묻는, 그래서 양심 따위를 논하는 직업 환경이 얼마나 새삼스러운 것인지 느낄 때도 있다.




상명하복이 정말 칼같이 지켜지던 조직문화였다.
윗선에서 말 한마디 떨어지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했다.
그런 방식으로 사업이 통째로 사라지기도 했고, 조직이 사라지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나도 우격다짐으로 임금도 동결시키고, 구조조정도 종용했다. 잘못들을 덮었다. 입을 막았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므로.
나는 말단 직원이고, 명령대로 움직이는 부품 같은 것이니까, 감히 이의를 제기할 생각도 못했다.
그럴 권한을 받은 적이 없으니까.
어떤 땐 마음이 불편하지도 않았다. 나는 오직 회사의 이익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까. 그것만이 내게 절대선이었으므로.
월급에는 그 모든 것에 대한 대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싸움닭처럼, 병거처럼 쉴 새 없이 싸워댔다. 그런 일을 하도록 길러졌다.
생존. 그 단어로 모든 것이 다 정당화되었다. 공생은 일단 내가 먼저 살겠다는 뜻이었다.
모든 비열함은 전략이라는 예쁜 이름으로 포장된다.
결국 구조적인 문제라는 건 알았다.
그러나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은 곧, 책임질 사람도 바꿀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시스템 속에 깔려 허덕이는 나약하고 불쌍한 사람들뿐이었다. 나도 그들 중 하나에 불과했고.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설령 그 안에서 직접 기여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게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은 아니므로 내가 나쁜 건 아니라는 발상은 얼마나 편리한가.

그때에 관한 기억이 뒤돌아 이렇게 상처가 될 줄 몰랐다.
여기선 내 의견을 묻는다. 내 의견대로 글을 쓴다. 설득할 기회도 있다.
그런 기회를 갖고 보니, 당연했다고 생각한 지난날들이 새삼 뼈아프다.

그러나 나는 그런 무력했던 기억, 부끄러운 기억을 통해 세상과 사람들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누군가에게 손가락질을 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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