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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바다거북 Feb 25. 2023

열매

내 경우엔, 시기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과 열매가 비교적 선명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이 처음부터 내 것은 아니었다는 걸, 아주 잘 안다.


어떤 열매는 몹시 즉각적인 것이어서, 받자마자 알았다.

또 어떤 열매는 시간이 많이 지난 이후, 썰물이 빠진 후에야 문득 발견되는 언덕처럼 그렇게 알았다.

받은 날이든 발견한 날이든, 나는 그 순간들을 꽤 뚜렷하게 기억하는 편이다.




하나님이 인격을 자근자근 밟고 계신다고, 혹은 인격을 믹서기에 넣고 분자 단위로 갈고 계신다고 느꼈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 와 돌아보면 스물셋, 넷 언저리부터 몇 년간 심한 우울증을 앓았었는데- 그 탓에 그 무렵의 기억이 거의 삭제되고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그때의 무너짐이 온전히 내부적인 것이었다면,

십여 년이 지난 후에 부메랑처럼 다시 되돌아온 그 이상한 시기는, 설명할 수 없는 외부적인 강제력이었다.

어떤 환경적인, 상황적인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데도- 사실 그 시기의 고난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정도의 고난이 새삼스러울 건 또 아니어서-  위로부터 강하게 찍어 누르는 알 수 없는 힘으로 인해 영혼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 무렵의 나는 아주 작은 내적 균열이라도 무심히 넘기지 않고 발견해내는 일에 매우 훈련이 된 상태였으므로, 이것이 내적인 요인이 아니라는 건 분명히 알았다.

내부적으로도,  외부환경적으로도 원인을 도통 찾을 수 없으니 대응을 할 수가 없었고, 그러니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버틸 수밖에.


별 도리 없이 스물네 시간 정말 하나님만 붙잡고 있었던 시기였다.

물리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었다.

감사했던 건, 잠잠히 주님을 묵상하면 명치부터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러면 살 것 같았다.

그게 오래가진 못했다. 5분, 10분만 지나면 다시 숟가락 하나 들 기력조차 없어졌다.

그러면 다시 반복이다. 주님 살려주세요. 채워주세요. 간구한다. 채워진다. 그럼 5분, 10분을 산다.

동나면 다시 주님 옷깃을 붙잡는다. 그렇게 무한반복.

말 그대로 눈 떠있는 모든 시간을 하나님만 붙잡고 살았다.

 

봄에 거꾸러져 겨울이 올 때쯤 회복되어 있었다.

거꾸러짐에 이유가 없었듯, 회복됨에도 아무 이유가 없었다.


그런 이상한 시기를 허락하셨던 이유를,

그 시험들을 지나오게 하신 후에 남겨 두신 열매들을 그땐 알지 못했다.




봄과 여름, 가까이서 그 꼴을 지켜보다가 회복된 후에야 다시 만난 친구는 말했다.

네 머리 위로 두툼한 밧줄이 하나 보이는 것 같다고.

심령이 몹시 안정되었다는 걸 그렇게 표현했었던 것 같다.


그 시기를 지나온 이후에, 마음을 회복시키는 일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기도 한 번, 예배 한 번이면 다시 살아난다는 걸, 이제 스스로 안다.


마음의 주권이 주님께 넘어갔다고 느낀다.

로봇처럼 스위치 온/오프 하듯 마음이 조종당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정들- 비록 부정적인 것들이라고 할지라도- 을 존중해 주시돼

다만 그 마음들이 영혼을 상하게 할 정도의 지나친 고통이 되진 않도록, 어느 선을 지켜주고 계신다고 느낀다.

그 안정감 덕분에 오히려 스스로의 감정을 더 잘 존중할 수 있게 되었다.

평생 감정의 문제로 고통받았던 사람으로서는 엄청난 해방이다!


내 안에 거친 것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을 향해 거스르는 뾰족한 가시 같은 마음들, 쓴 뿌리 같은 죄성들은 어쩌면 평생 가지고 가야 할 숙제인지 모른다고 여겼었다(그래서 유순하고 온유한 배우자를 원했었다).

그런데 이제 알겠다. 하나님이 내 이빨과 발톱을 다 뽑아가 버리셨다.

억지로 거스를 강퍅한 마음을 먹으려 해 보아도, 도무지 그럴 마음 자체가 들지 않는다.


그런 열매들을 하나씩 확인해 가는 요즘이다.

요즘은 스스로가 참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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