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 마이웨이> 가 말하고자 했던 것과 나에게 닿은 것
몇 년 전에,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책이 크게 히트를 치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청춘이라고 부르긴 조금 모자란 어린 나이였는데, 책의 성공과 더불어 '아프니까 청춘' 이라는 말도 유행처럼 번졌던 걸로 기억한다. 아직 청춘이 오지 않은 나에게 그 책은 뭐랄까, 아직 손대지 않은 일종의 바이블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교복을 벗게 되면 꼭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왠지 그래야 진짜 어른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그 '청춘' 이 되었을 때, 이 책은 불쏘시개가 되었다. 청춘이 된 내 앞에 다가온 현실은 성장통으로 포장하기에는 너무도 무거웠고, 왜 청춘은 아파야 하고 힘겨워야 하는지에 대한 반문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으며, '아픈 청춘' 이라는 단어는 격려의 말이 아니라 팩트 폭력이 되었다. 그런 알량한 말로는 위로받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은, 우리가 서 있는 이 곳은 생각보다 더 가혹한 곳이었고 그만큼 청춘은 힘들었다.
그들도 어린 날의 우리처럼 꿈 많고 호기심 많고 호기로웠던 젊음이었고, 당연하거나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포기하면서 '그냥 어른' 이 되었을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진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되면 우리는 호기로움을 철없음으로, 꿈을 헛바람으로 바꾸어 부르게 될 것이다. 모두가 그래왔듯이.
"우리는 항상 시간이 없었다.
남보다 일찍 일어나고, 남보다 일찍 자는데도 시간이 없었다.
누구보다도 빡세게 살았는데, 개뿔도 모르는 이력서 나부랭이가 꼭 내 모든 시간을 아는 척 하는 것 같아서.
분해서, 짜증나서 울었다."
드라마는 환상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면접에서 열정과 자신감을 보여주니 누군가가 가능성을 알아보고 덜컥 합격시켜준다는 뜬구름 잡는 소리도 없고, 쥐뿔도 없는 주인공이 어떤 기회로 인해 주류의 중심으로 당당히 입성하는 일도 없다. 여자 주인공은 억압과 속박을 상징하는 반쪽자리 유리구두를 집어 던지기까지 한다. 격투기 선수와 링 아나운서라는, 메이저라고 하기는 뭐한 그런 위치에서 드라마는 끝이 난다. 그 애매한 위치까지 올라가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시련과 좌절을 겪는다. 하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누군가에겐 마이너로 여겨지고 또 어떤 누군가는 내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삶이 패배한 삶이 되지는 않는다는 걸, 내가 당당하고 쫄지 않으면 그 어떤 곳에서도 나는 메이저가 될 수 있다고 그들의 삶은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네가 있는 데가 메이저 아냐?
그냥 더 가슴 뛰는 거 해."
아프니까 청춘인 건 맞는데, 청춘은 맞아서 아픈 것이 아니라 때려서 아픈 것이다. 미성숙한 존재라는 딱지를 붙이고 여기저기서 맞고 상처받고 좌절하면서도 그 상처에 억지로 붕대 감아가며 주류까지 올라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 다 해 가면서 내가 때려보고 그 아픔에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나가는 것이여야 한다. 청춘은 주체여야만 한다.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는 사회가 잘못한 것이다. 청춘은 실패를 딛고 일어서게 해 줄 좋은 변명이어야 한다. 나에게 있어서 좋은 변명이어야지, 나를 상처주는 사람들에게 자기 합리화의 빌미가 되어선 안된다. 아파서 힘들어야 청춘이 아니라 사고쳐야 청춘이고, 젊음은 돌아오지 않으며, 아끼지 말고 마음껏 써야 빛나는 삶이라는 걸. 청춘이라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허투루 쓰지 말 것을 깨닫는다.
"남들이 우습게 본다고 내 인생이 우스워지나."
브런치에서 본 글 중에 '타인의 하이라이트와 나의 비하인드를 비교하지 말아라' 는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청춘은 푸를 청에 봄 춘 자를 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하이라이트, 봄을 맞이하기 위해 열심히 땀흘리고 노력하는 청춘들에게 박수와 경의를 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