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경마장에서 교토대상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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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경마장은 교토와 오사카 중간쯤 있어, 교토에서 오사카로 넘어가면서 들르기 좋았다. 심지어 이 날은 가을 천황상이나 아리마 기념 등 큼직한 경기들의 전초전인 교토대상전이 열리는 날! 그래서 반나절을 투자해 교토경마장 투어를 하기로 했다.
요도역에 도착하자마자 JRA가 박힌 새하얀 건물이 보였다. 사전에 교토경마장 후기 글들을 보았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긴장감과 흥분감이 얽힌 두근거림이었다. 혼자서 일본의 경마를 잘 즐길 수 있을까라는 걱정과 우마무스메에서만 보던 것들을 실제로 체험해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었다.
역에서 건물까지 연결된 지상통로가 있어 교토경마장으로 쉽게 갈 수 있었다. 길을 쭉 따라가다 보니 금세 교토경마장 2층에 도착하였다. 심지어 교토경마장 프리패스 날이어서 표 검사도 따로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교토경마장이 너무 넓어서 처음에는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내 눈에 띈 것은 바로...
타즈나였다. 타즈나는 실재했던 것이다. 비록 초록색이 아닌 파란색이었지만 색을 덧입히면 타즈나와 판박이였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 단순히 안내원이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낯선 곳에서 익숙한 모습을 보아서 그런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나는 캐리어를 맡겨야 했기 때문에 타즈나한테 코인라커의 위치를 물었다. 여기서 꿀팁을 주자면 '라커'라고 하지 말고 '로카'라고 하자. 처음에 '라커 도코데스까?'라고 했다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길래 내 캐리어를 연신 가리키니 '아! 로카!' 하면서 안내해 주었다.
교토경마장에서는 무료 코인라커라는 엄청난 복지혜택이 있다. 심지어 코인라커의 개수도 어마어마해 짐을 못 맡길 일도 없다. 대신 오후 4시 30분 이후로는 강제로 라커를 개방한다고 하니 이 점만 주의하자.
1층 야외
야외 잔디밭에는 나들이 온 커플이나 가족들이 모여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혼자 왔기에 피크닉은 뒤로 하고 각종 전시물을 보러 다녔다.
제일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말을 본뜬 동상이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나리타 브라이언의 섀도우 롤과 같은 소품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걘가?' 하며 가까이 다가갈수록 정교하게 만들어진 굴곡들에 의해 빛나는 자태를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밑에 적힌 안내판을 보면서 비록 우마무스메만 했지만 원본마를 맞출 수 있다는 신기함에 기쁨을 소소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경주마의 실제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그냥 슥 지나치려 했는데, 뒤따라오던 현지인 아주머니가 갑자기 "미스터 시비~!" 하면서 달려왔다. 겉모습은 40대 혹은 50대처럼 보이셨는데 미스터 시비의 활동연도를 생각해 보면 50대 후반이겠거느니 생각했다. 자신의 청춘을 함께했던 미스터 시비의 동상을 쓰다듬으며 일본어로 이런저런 말을 하셨는데, 말투와 억양을 보면 시비한테 그리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말의 팬을 처음 보는지라 신기한 광경이어서 좀 더 있고 싶었지만, 남들이 보는 앞에서 보물을 꺼내는 건 부끄러운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자리를 비켜주기로 했다.
조금만 더 걸으면 구석진 곳에 묘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타카라즈카 기념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라이스 샤워를 기리는 묘비였다. 살아생전에 축복 하나 제대로 못 받던 라이스 샤워가 헌화와 헌당근을 잔뜩 받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미소와 동시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미소는 축복받는 그 모습이 좋아 지어졌지만, 기구한 인생은 죽어서 끝나야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건가 싶은 마음에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얽힌 덩굴 마냥 한 번 얽히기 시작하면 자르는 것 밖에는 정말 답이 없는 걸까? 모두가 덩굴 하나쯤은 갖고 있을 텐데 말이다. 갑자기 이상한 생각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길래 축복받는 이 앞에서 분위기를 망치는 말을 하기보다는 같이 축복한 후 자리를 뜨기로 했다.
경마 베팅하기 (마권 구입하기)
이제 경마의 꽃, 베팅을 해보자! 하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베팅을 하기 위해선 일본어로 적힌 마권을 이해해야만 했다. 분명 이 정도의 인프라와 코인라커 무료개방이라는 복지를 갖출 정도면 분명 한국어로 적힌 가이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층 인포메이션 센터에 있는 타즈나한테 가서 베팅 가이드를 달라고 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왈왈 짖는 강아지를 보는 눈빛으로 나를 볼 뿐이었다. 그렇다. '베팅 가이드'라는 영어는 통하지가 않았다.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로카라 발음하는 타즈나의 모습. 도대체 베팅은 일본에서 뭐라고 할까? 벳? 베또? 베팅구? 다 말해도 타즈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길래 식은땀이 줄줄 났다. 동물원의 침팬지가 된 느낌이었다. 저 멀리 있는 베팅 표지판을 가리키면서 베또 베또 해봤지만 내가 뭘 가리키는지 알 리가 만무했다.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베팅과 관련된 단어를 다 꺼내려고 '머니'라고 하니 그제야 타즈나는 웃음을 활짝 띄면서 '니혼고 와카리마스까? (일본어 아시나요?)'라고 물어봤다. 일본어를 모르니 베또 베또 했을 텐데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웃겨서 실없는 웃음을 지으면서 아니라고 했다. '에고? (영어는?)'라 물어보길래 이거다 싶어 바디랭귀지와 함께 이해할 수 있다고 혼신을 다해 어필했다.
그렇게 얻은 눈물의 How To Bet과 출전마들의 정보와 전적이 담긴 책자. 심지어 마권 구매표를 작성할 때 알아보기 쉬우라고 템플릿 카드도 준다. 가이드에는 나 같은 문외한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림으로 쉽고 자세하게 설명이 나와있다. 학창 시절에는 그렇게 재미없던 OMR 카드 작성이 이렇게 재밌을 줄은 몰랐다.
가이드에는 베팅 방법뿐만 아니라 진지하게 말을 관찰하는 법도 알려준다. 내 기억상으로는 약 5가지 방면으로 말을 관찰하라고 적혀 있었다. 대충 고개가 올곧고, 털에 윤기가 흐르며, 리드미컬하게 잘 걷는 말이 컨디션이 좋고 잘 뛴다고 했던 것 같다.
컨디션을 보는 법도 알았겠다, 당장 패덕으로 뛰어갔다. 고개가 올곧고, 털에 윤기가 흐르며, 리드미컬하게 잘 걷는 걸 봐야 한다고 했는데... 이론으로는 알고 있는데 실전에 적용하기는 어려웠다. 어떤 게 올곧은 거고 어느 정도가 윤기가 흐르는 건지, 또 리드미컬은 도대체 어떤 느낌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패덕에서 마음에 드는 놈을 뽑기로 했다.
패덕에는 재밌는 점들이 많았다. 일단 걸음걸이도 제각각이어서, 테이오 스텝 같은 걸음걸이에 왜 명칭을 붙이는지 알 것 같았다. 총총 걷는 말들이 있는가 하면 성큼성큼 걷는 말들도 있었다. 혹은 자기만의 걸음걸이를 선보이는 말들도 있었다. 보법이 다른 놈들은 눈에 띄기 때문에 테이오 스텝을 기대하며 아까 받은 책자로 전적 검색을 해봤는데, 썩 훌륭하진 않았다.
또 말이 패덕을 거부하는 일도 있었다. 정확히는 패덕을 하다가 갑자기 난리를 쳐서 패덕을 이탈해 버렸다. 사람들이 들러붙어 어떻게 어떻게 패덕에 다시 합류시켰지만, 이미 초 흥분상태였다. 심지어 뒤에 있던 말들도 덩달아 흥분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문득 우마무스메의 흥분 상태가 떠오르면서 역시 경마는 운빨ㅈ망겜인 것을 실감했다.
패덕까지 봤으면 이제 마권을 구입하면 된다. 아까 받은 템플릿 카드로 마권 구매표를 열심히 작성해 기계에 넣으면 마권이 쏙 하고 나온다. 참고로 현재 배율이 어떻게 되는지도 자세하게 알려주고 읽는 법 역시 가이드에 상세하게 나와 있으니, 패덕에서 본 말의 컨디션과 배율을 보고 구매표를 신중하게 작성하면 되겠다.
마권 기계 앞에 서서 구매표를 넣으려고 하니 돈부터 넣으란다. 알고 보니 마권 기계는 돈을 먼저 넣고 구매표를 넣는 형식이다. 돈을 먼저 투입하고 돈이 허락하는 한 구매표를 마구 투입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니 나처럼 당황하지 말고 미리 구매표에 기입한 금액 이상을 준비해 먼저 투입하도록 하자. 그렇게 진짜 마권을 손에 넣었으면 이제 경기를 보러 가면 된다!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 경기를 굉장히 앞에서 볼 수 있었다. 사토노 다이아몬드 아들램 사토노 글란츠와 딥 임팩트의 손자 딥 본드가 출전했다. 사실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딥 임팩트의 아들램이니까 딥 임팩트 손자들의 대결이었다.
내가 본 교토대상전은 여러모로 재밌는 경기였다. 최종 직선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누가 몇 등인지 모를 정도로 나란히 골인 지점에 들어왔다. 덕분에 전광판을 기다리며 비디오 판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판독 결과 인기 순위에서 밀리던 말이 1착을 하였고 딥 본드는 2착을 하였다. 사토노 글란츠는 몇 등이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뒤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서 탄식이 들렸는데 작은 환호성도 같이 들리는 게 꿀잼이었다.
경기가 더 재밌었던 이유는 내 옆에 있던 딥 본드의 팬 덕분이었다. 저 끝에서 달려올 때부터 "본~도! 간바레!" 하면서 응원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 우마무스메에서만 보던 온리 키타산과 온리 사토노 팬을 내가 직접 보고 있는 것이다. 골라인을 통과하면서 큰 목소리로 "본~도! 어쩌고"라고 일본어로 외쳤는데, 고생했어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전광판에서 딥 본드의 2착 소식을 보자마자 잘했어라는 느낌의 외침을 한 후 건물로 들어가더라.
나는 우마무스메로 밖에 경마를 접해보지 않아 그냥 사토노 다이아몬드의 아들램인 사토노 글란츠를 응원하기로 했었다. 상상 속에서 통 크게 사토노 글란츠에게 걸었는데 몇 등인지도 모를 정도로 뒤에 있는 모습을 보니 머리가 뜨거워지면서 꿀밤을 한 대 먹여주고 싶었다. 그래도 재밌는 경험이었기에 한 번 봐주기로 마음먹었다.
엎치락뒤치락 경기도 보고, 순수하게 말을 좋아하고 응원하는 팬도 보고, 그리고 상상 속에서 돈도 잃고 나니 어느새 오후 4시가 되었다. 약 3시간 남짓 경마장에서 놀았던 것인데 속이 꽉 찬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충만함을 갖고 오사카로 가는 기차를 타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