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수도원에 소리 없이 찾아온 봄비가 새벽 미사의 경건함을 더하고 있다. 독서 말씀이 끝나고 꼬마 수사는 살짝 열린 경당의 창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새벽의 상쾌하고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켜 잠을 쫓았다. 복음 말씀이 선포되고 곧 원장 수사님의 강론 말씀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원장님의 말씀은 종일 묵상할만한 내용이었기에 꼬마 수사는 그 말씀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늘 말씀은 비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말씀이셨다.
"비유하자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물은 생명에게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길러주고 키워주지만, 그 공을 자기의 것으로 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지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러했습니다."
꼬마 수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설렜다.
"물은 모든 것을 정화합니다. 자신은 더러워지더라도 모든 것을 마치 처음처럼 되돌려놓습니다. 그분의 사랑도 그렇지요. 우리의 영혼이 진홍처럼 붉은 죄로 물들었더라도 그분의 사랑을 애타게 찾고 그분 앞에 자신의 더러움을 드러내는 영혼은 다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부활절을 앞둔 원장님의 말씀에는 힘이 있었다.
물은 모든 것을 정화합니다
"또 주님께서는 마치 빗물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가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신 다음 다시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흐르는 물처럼 자유로우셨고, 어디에 머무르시든 언제나 낮은 자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이로써 그분의 마음은 깊은 강이 되실 수 있었고, 넓은 바다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그 뜨거운 사랑으로 품어주셨지만, 그분의 사랑은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모든 것을 자녀들을 위해 내어놓으셨습니다."
꼬마 수사는 그 사랑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아 가슴이 두근거리고 벅차올랐다. 그리고 이어서 원장님은 복효근 시인의 '뜨지 않는 별'이라는 시를 읽어주셨다.
"별이라 해서 다 뜨는 것은 아니리
뜨는 것이 다 별이 아니듯
오히려
어둠 저편에서
제 궤도를 지키며
안개꽃처럼 배경으로만 글썽이고 있는
뭇 별들이 있어
어둠이 잠시 별 몇 개 띄워 제 외로움을 반짝이게 할 뿐
가장 아름다운 별은
높고
쓸쓸하게
죄짓듯 앓는 가슴에 있어
그 가슴 씻어내는
드맑은 눈물 속에 있어
오늘 밤도
뜨지 않은 별은 있으리"
이어지는 원장님의 말씀을 듣는 7살 꼬마 수사의 눈동자는 무엇인가 결심한 듯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풍요롭고 행복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눈과 몸은 그 마음이 가는 곳을 따라간다고 하지요. 그의 걸음은 부유한 사람들이 아닌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 죄인들에게로 향했고, 그의 그림자는 늘 그들 곁에 머물러있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기름지고 화려한 왕궁보다 거칠고 황량한 광야를 바라보고 있었지요. 상처와 고통으로 아파하고 절망과 좌절만이 가득한 마음들이 사는 곳.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시기를 원했습니다. 유심히 그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사랑으로 촉촉했고 그의 다정한 목소리는 마음이 가난한 이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길과 생명 길을 가르쳐주었지요. 희망과 위로를 불어넣어주었습니다. 유심히, 온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길이 오늘 더욱 그리워집니다. 그 사랑스러운 시선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 별들의 소명은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품은 것들을 혼신의 힘을 다해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러했지요. 날개가 없어도 처음부터 있었던 하늘로 오를 수 있는 빗물처럼.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어도 꽃을 피우는 들꽃처럼. 형제들의 삶도 별처럼 빗물처럼 들꽃처럼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형제들에게 부어주신 사랑으로 서로 다투어 사랑의 꽃을 피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미룰 수 없는 사랑을 하라고 부르셨음을 명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