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부자는 하느님께 허락받았다고 주장하자, 베드로는 도대체 가방에 무엇이 들었는지 한 번 보자고 했다.
가방을 열어 본 베드로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 아니, 도로포장 재료는 뭐 하러 이렇게 잔뜩 가져왔습니까?”
# 파도와 아이
아장아장. 엄마랑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걷고 있던 아이의 눈에 큰 파도가 들어왔다.
"엉마......"
금세라도 덮칠 듯 달려드는 파도를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엄마가 물었다. "저거 뭐지......?"
"아빠."
# 두 개의 이름
엄마! 아빠!
세상에 딱 두 개의 단어밖에 모르는 아이처럼
내게도
그 이름이 세상의 전부가 되고
온 세상이 그 말속에 있고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날들이 있었다.
# 고집스러운 자아
엄마와 아빠의 이름만으로도 행복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내게도 이름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날부터 내가 중심이 되었지요.
엄마와 아빠라는 존재보다 내가 먼저가 되고 때로는 나 아닌 다른 모든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조종하려들기도 했지요.
나는 온전하고 완벽한데 엄마와 아빠를 포함해 모두가 잘못되었으니까, 회개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세상과 저들 모두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집이 점점 세어졌습니다. 반항하고 저항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깨지고 부서지고 상처 받는 것은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나의 고집은 발 뒤꿈치의 굳은살처럼 매일매일 내 마음에서 굳어져 갔고 더욱 단단해져 갔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상처 받은 것은 내 마음이었고, 그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개씩 반창고가 필요했지요.
# 자기 맘대로
클레쇼프 효과(Kuleshov effect)라는 말이 있지요.
소련의 영화감독 겸 이론가였던 레프 클레쇼프(Lev Kuleshov)가 주창한 쇼트 편집의 효과를 말하는데요.
1920년대 러시아의 국민 배우였던 '이반 모주힌'의 무표정한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그다음 장면에서 인형을 안고 있는 아이를 보여 주었습니다.
다음에는 마찬가지로 배우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여 준 뒤에 따뜻한 수프가 담겨 있는 그릇을 보여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역시 무표정한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뒤에 관 속에 누워 있는 여자가 나오는 영상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관객들에게 이 배우의 생각을 읽어보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인형을 안고 있는 아이를 보고는 난 뒤, 그 배우가 흐뭇해하고 있다고 답했으며, 수프를 보고 난 뒤에는 그 배우가 배고파하는 것 같다고 말했고, 관속의 여자를 보고 난 뒤에는 그의 사진을 보며 그가 슬퍼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배우의 얼굴은 내내 똑같은 무표정이었음에도 말이지요.
우리는 자기 맘대로 타인을 바라보고 해석하며, 판단합니다. 자기의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상대가 험하게 변해서 자신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변한 건 자기의 마음이 아닐까요? 타인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말이지요. 누구의 마음이 정화되어야 할까요? 누가 회개해야 할까요?
# 내 안의 우상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탈출 20,2-3.)
내 안의 내가 있습니다. 나의 우상입니다. 내 안의 성전에는 내가 살고 있습니다. 내 안의 나는 하느님보다 더 지혜롭고 똑똑합니다. 내가 원하면 무엇이든 다 그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타인이 그렇듯이 하느님도 내 맘대로, 내 원의대로 따라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보다 더 전능하고 하느님도 내 성전의 소유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우상들(소유물)로 가득한 성전이 정화되기를 온몸으로 간절히 원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 누가 회개했을까?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였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요한 2, 23b-24)
결국 하느님께서 회개하셨습니다. 자녀들의 고집을 이길 수 없는 부모님이 마음을 바꾸듯이, 모두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어리석게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은 십자가가 마침내 유다인들에게 영원한 표징이 되었고 그리스인들에게는 신의 지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2-2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