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단지

판단 중지

by 진동길


# 골프장에 간 예수님

어느 날 예수님과 모세와 한 노인이 골프를 쳤다.

예수님께서 먼저 치셨다. 아쉽게도 공은 호수에 빠지고 말았다. 예수님께서는 주저하지 않고 호수 위를 걸어 올라가시어 물 위에서 다시 그 공을 치셨다.

이번에는 모세 차례였다. 모세가 힘껏 티샷을 날렸다. 안타깝게도 모세가 친 공도 호수에 빠졌다. 모세도 역시 당황하지 않고 호수 앞에 서더니, 호수의 물을 갈라 버렸다. 갈라진 호수 바닥에서 공을 찾아내어 힘껏 공을 쳐 온-그린을 성공했다. 모세는 의기양양했다.

이번엔 마지막 남은 노인도 티샷을 쳤다. 그런데 역시 노인이 친 공도 힘없이 날아가더니 돌돌 굴러 아까 모세와 예수님께서 공을 빠뜨렸던 그 호수에 빠졌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공을 물속에서 럭비공만 한 붕어가 삼켰고, 그 붕어를 다시 지나가던 독수리가 물었다.

더 놀라운 일은 그린 위를 독수리가 날아서 지나갈 즈음, 붕어가 그 골프공을 떨어뜨렸고 공은 데굴데굴 굴러 홀컵에 들어가고 말았다.

정말 기막힌 홀인원이었다. 그러자 이것을 쭉 지켜본 예수님께서 그 노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발 골프 좀 정상적으로 치세요...!"

# 일시정지, 판단 보류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피정들은 대부분 신학생 때, 수도원 형제들과 함께 했던 피정인데요.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피정은 김태홍 안드레아 신부님과 함께했던 피정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각각 한 발씩 하나로 묶고 목적지까지 무사히(?) 다녀와서, 다 함께 느낀 점을 나누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서로 발목을 묶어야 하는 짝지 형제는 안드레아 신부님의 특별히 의도된 배려로(?)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서로 친하지 않은 형제들끼리 묶여야만 했지요.

난감했지만, 저희를 더 당황하게 했던 것은 둘 중에 한 사람은 눈을 가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간지점에서 그 역할은 바뀌었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현실과 친하지 않은 형제랑 발목을 묶고 목적지까지 함께 다녀와야 한다는 상황은 그야말로 곤욕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무사히. 그리고 평화롭게 피정을 마치기 위해서. 두 형제는 서로의 가슴속에 깊이 품고 있던 불편한 감정은 잠시 꺼놓아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전에 가졌던 선입견과 판단은 ‘일시정지 상태’로 두어야 했습니다. 판단 보류해야 했지요. 앞을 볼 수 없는 눈처럼.

온전히 서로에게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형제는 다른 형제가 내딛는 걸음에 자기 걸음을 내맡긴 채,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뎌야 했습니다.

# 내가 너를 구하려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과 사연은 마태오복음에서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지요.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 54-58)

심지어 고향 사람들은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힐책하시는 예수를 끌고 고을 밖으로 내몹니다.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시지요.(참조: 루카 4,24-30)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고 메아리도 산이 있어야 되돌아오는 법이지요.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응답할 때 기적은 내게로 옵니다.


자기중심적인 선입견과 편견, 부정적인 믿음으로 마음이 완고해진 고향 사람들은 ‘새로 태어남’을 이해하지 못했고, ‘하느님의 자비와 그분의 권능’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 어떤 선물도 안겨줄 수 없었습니다.

# 메시아 배척 사건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 점점 다가오고 십자가 사건과 그 시간을 묵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고향 나자렛에서의 오늘 메시아 배척 사건은 루카 복음서 전체의 결론을 미리 알려주는 말씀인데요.

고향 사람들처럼 우리는 이제 곧 이스라엘 백성의 원로들과 지도자들의 힘을 업고 그분의 이름을 더럽히고 그분을 배척할 것입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분을 십자가의 길로 내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내치신 분. 그리고 우리가 버린 그 이름 구원자 예수. 그분은 이제 곧 희생 재물이 되실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말이지요.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수님께서는 배척받고 돌아가시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다인들에 배척받은 메시아. 그분의 말씀은 기쁜 소식이 되어 이스라엘을 넘어 세상 끝까지 전파됩니다.

# 코끼리 만지기

인도의 경면 왕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장님들을 모아 코끼리를 만져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왕이 물었습니다.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보라."

그러자 그들은 제 각각. 상아를 만져본 이는 '굵은 무'라고 말하고, 귀를 만져본 이는 '큰 부채'라고, 머리를 만져본 이는 '돌', 코를 만져본 이는 '절굿공이'라고 말했으며, 배를 만져본 이는 '항아리'라 하고, 꼬리를 만져본 이는 '새끼줄'이라고 했습니다.

‘맹인모상(盲人模象: 장님 코끼리 만지기)’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각자 자기가 본 것이 진실이라 주장합니다.

자기가 본 것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단편적으로 꾸짖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부처를 단정 짓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 이야기인데요.

장님들이 이야기한 것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은 자신의 주장만 고집함에 있습니다.

우리들도 코끼리를 만진 장님처럼 자신이 본 것만 믿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봤다고 생각했던 것이 전체가 아니라 자신이 보려 했던 일부분이고, 들었던 것들이 전체가 아니라 자신이 듣고 싶었던 일부분일 때가 많습니다.

# 사랑으로 사랑을 낳을 수 있기를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 한번 더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나를 겸손으로 이끌며,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과 이웃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1코린 13, 9-10.)

제대로 알기 위한 조건. 그것은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잘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앎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이기에 그렇습니다.

'잘 모른다'는 마음은 상대방을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참고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그 영혼은 형제의 아픔과 상처까지도 보고 들을 수 있겠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예언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불림받았습니다.

때론 조롱을 받을 수도 있고, 내쳐질 수도 있습니다. 고난의 삶, 손해 보는 삶. 희생의 삶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의탁하여 그 사랑을 선포하는 것이 메시아의 길이지요.

다시 만나는 새로운 날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상대의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 안에 시기와 질투, 욕심이 일어서면 결코 좋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선하고 아름답고 기쁘고 행복한 일들은 내게서 떠나가 버립니다.

나와 내 이웃과 세상을 탓하고 비난하기보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라도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구원은 나로부터 그리고 지금 여기서부터 매 순간 시작되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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