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요한 8,2-5)
아침부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적발된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께 처분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간음죄에서 남자들이 빠져 있는 당시의 율법도 못마땅하지만, 한 사람의 목숨을 빌미로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려는 소위 지식인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행태가 불편합니다.
# if / even if : 만일/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예수님이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쳐라!”라고 말씀하신다면. “나는 세상을 심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려고 왔다”(요한 3,17)라고 하신 평소의 가르침과 행동에 위배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을 풀어 주어라!”라고 말씀하신다면 “나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하신 당신의 사명에 거스르는 말씀이 됩니다.
율법을 지킬 것인가? 사람을 지킬 것인가? 과연 무엇을 지켜야 하고 또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 버려야 할 것
단하소불(丹霞燒佛): ‘목불을 쪼개어 불을 피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단하천연(丹霞天然, 739-824) 스님의 이야기인데요. ‘단하’(붉은 저녁노을) 스님이 불상을 태운 일화입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당나라 시기 유명한 고승인 단하천연(丹霞天然)이 낙양 동편에 있는 혜림사에서 하룻밤 묵을 때 벌어진 일입니다. 때는 겨울이고 객실은 차가운 냉골이었습니다.
눈까지 내려 추위에 떨던 단하는 결국 대웅전에 올라가서 금색 불당의 목불(木佛)을 쪼개 불을 지핍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언 몸을 녹이고 있었지요.
불꽃이 한창 좋을 때쯤, 사찰에 난리가 났습니다. 주지 스님은 맨발로 쫓아 나왔습니다. 성스러운 불상을 태워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봐요, 객승! 불상을 쪼개서 불을 피우다니 미쳤소?”
이때 단하 선사는 막대기로 재를 뒤지면서 주지 스님에게 응대를 합니다. “목불을 다비(화장)해서 사리를 얻고자 해서입니다.”
주지 스님이 다시 노발대발합니다. “정신이 나갔소. 목불인데 어떻게 사리가 나올 수 있겠소?”
“사리가 없다면 나무토막이지 어찌 부처라고 할 수 있겠소? 주지 스님, 좌우 두 보처불(補處佛)도 마저 불 때 버립시다.” -참조: 현대불교신문, 한겨레-
# 지켜야 할 것
율법과 그 정신. 율법의 본질을 잃은 율법은 목불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을 보호하고 있는 달걀의 껍질 또한 쉽게 버릴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율법입니까? 그 정신입니까? 사람입니까? 달걀 껍질입니까? 알입니까?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입니까? 무엇을 지켜야 하고 또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8,7)
모세의 율법이 여자를 용서하지 말라고 하였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용서를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8,8-9.)
대신 그들이 용서할 수 있도록 명분과 시간을 주시고 기다리십니다. 용서를 위하여 먼저 자신을 바라보라고. 돌을 자신도 똑같은 죄인임을 직면하라고. 자기 삶의 내용을 둘러보라고 시간을 주시며 기다리십니다.
타인이 저지른 아흔아홉 개의 죄만 바라본다면 용서의 마음은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눈을 돌려 자신이 지은 작은 죄 하나라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용서는 시작됩니다.
“이미 내가 지적했듯이 유다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다 같이 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아무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입니다.”(로마 3,9-10.20)
그 누구도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교만과 오만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일 뿐입니다.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 드는 우리의 자기중심적 지식과 생명을 모질게 함부로 대하는 인간의 폭력적 교만이 우리를 더욱 어리석게 하고 있어 안타깝고 안쓰럽습니다.
# 온전한 의로움으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예수님은 율법과 사람. 달걀 껍데기와 알을 모두 지키셨습니다. 그러나 그 껍질은 새로운 계명입니다. 사랑의 껍질입니다. 달걀이 온전히 부화하기를 원하셨기에 형상과 본질, 모두를 소중히 지키셨습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누가 누구를 심판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빼내어 주겠다.' 하겠느냐?”(마태 7,1-2.4)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율법은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어기는 죄인들이 율법의 칼을 휘두를 수는 없습니다. 죄인들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죄인을 벌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의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8,11)
하느님만이 율법과 죄의 주인이십니다. 그분만이 죄를 단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죄인을 단죄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아버지의 나라로 초대하십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밖에서 깨어진 달걀은 죽어서 프라이가 되고 스스로 안에서부터 깨어지는 달걀은 살아서 (부화되어) 병아리가 되지요.
누군가에 의해서 깨어지기보다 자기 내면에서 깨어지서 다시 살아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죄인들의 나라입니다. 죄의 역설입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이들이 사는 나라. 천국입니다.
그분의 나라는 이미 와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 곁에 있습니다. ‘순결한 창녀’들의 나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창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결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죄 없다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이사 43,18-19)
# 그리고 부활
부활의 삶을 살고 싶은가? 그때를 먼 미래로 미루지 마라. 지금 당신의 몸을 쪼개도록 하라. 그분처럼 우리의 몸을 쪼개어 남에게 나누어 줄 때 우리는 그분처럼 남에게 부활의 몸이 될 것이다.
부활의 삶을 살고 싶은가? 그리스도처럼 성체가 되어라. 자기의 몸을 남을 위하여 쪼개라. 그리고 남의 몸 안으로 들어가 소화가 되어 사라져라.
부활의 삶을 살고 싶은가? 자기 살 생각을 포기하고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놓아 사라지게 하라.
부활의 삶은 ‘나’를 사라지게 하여 ‘세상’을 살리는 데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범하는 부활에 대한 오해는 ‘세상’을 살리는 일보다 자기 사는 것에 온 마음을 쏟는 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