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5년 11월 25일, 통나무를 가득 싣고 항해하던 ‘프랜시스 스패이트’호가 풍랑을 맞아 좌초했다.
다행히 화물칸에 가득 찬 통나무의 부력으로 가라앉지 않은 채 표류하던 선체에는 18명의 선원이 생존해 있었다.
식량도 바닥나고, 빗물을 받아 겨우 연명하길 13일째, 그동안 어떤 배도 지나지 않아 구조의 희망은 희미해져 있었다.
모두가 굶어 죽을 것이라는 극한의 공포에 내몰렸을 때, 선장이 제안을 한다.
“오지 않는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다 모두가 굶어 죽기보다는, 소수를 희생해 다수가 사는 길을 택하자.”
제비뽑기를 통해 한 명을 고른 뒤 그의 고기를 먹자는 얘기였다. 격론이 벌어졌지만, 선장을 비롯해 나이와 경험이 많은 선임 선원들의 주도로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이자는 만장일치에 도달했다.
그 결과 가장 어린 15세의 수습 선원 ‘오브라이언’이 뽑혔다. 소년은 죽음을 받아들였고, 나머지 선원들은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모두 3명이 희생된 뒤 ‘프랜시스 스패이트’호는 인근을 지나던 배에 발견되어 구조되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모두 살인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길고 격렬한 법정공방 끝에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공리주의’적 논리와 피해 당사자들이 ‘동의’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무죄 판결을 받게 된다.
법적으론 합리화, 정당화되었지만 윤리적 철학적 논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하며, 다수의 생명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소수의 생명을 희생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인본주의’ 사상에 반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일부 선원이 지인에게 사실 제비뽑기는 선장과 선임 선원들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다.
자신이 희생당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주도한 ‘다수를 위한 소수 희생 합의’는 공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ㅡ표창원ㅡ
# 침몰하는 양심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요한 11,47-48)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시어 병들고 지친 사람들을 당신께로 끌어 모으셨는데, 예수님의 이 같은 행보와 상황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긴박한 딜레마였습니다.
예수님의 표징 자체는 믿었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며 모두 예수님을 믿을 것이고, 이를 틈타 모인 군중이 어떤 폭동을 일으킬지 알 수 없으므로 유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군중들의 모임을 항상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행여 군중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킨다면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인들의 눈에는 아주 위협적으로 보일 것이고, 만일 그렇게 되면 성전은 물론이고 이스라엘 민족은 처참하게 짓밟힐 것이 불 보듯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9-50)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하면서 작은 것을 위해 큰 것을 포기하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죄로 물든 어긋난 욕망은 이기주의와 집단적 이기주의에 쉽게 사로잡히는 되는데요. 전체를 위한 희생, 혹은 다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수많은 그릇된 명분들이 낳은 살인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인류의 양심과 역사의 핏빛 가운데 지울 수 없는 무고한 희생들의 피가 얼마나 많습니까?
힘 있는 이들의 이기적인 욕망이 낳은 명분은 자연스럽게 폭력을 정당화하고 다수의 힘에 이끌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류 편에 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 하느님과 양심 앞에 분명히 틀린 방법이었고 역사를 뒤돌아볼 때 사필귀정, 바르지 않은 선택은 훗날 지울 수 없는 대가를 청구한다는 것을 인류는 무수히 경험해 왔지요.
그러나 원수의 악한 의도마저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께서는 카야파의 생각에 작용하시어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을 하게 하시는데요. 그 예언에는 '예수님께서 이 민족을 위하여 또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의미가 담겨있었습니다.
# 영적 세속성
“영적 세속성은 신앙심의 외양 뒤에, 교회에 대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서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자기의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추구하지 않는’ 교묘한 방법입니다.”(복음의 기쁨 93항)
“영적 세속성이 교회 안에 스며들면, 단순히 도덕적인 다른 모든 세속성보다 더 엄청난 재앙입니다."(앙리 드 뤼박, 교회에 관한 성찰)
‘영적 세속성’에 빠진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는 선택을 합니다. '전체를 위한 희생'이라는 명분이었지요.
나 자신의 명예나 안위, 이기주의적인 욕심에 우선을 두고 세상의 다른 모든 것. 하느님과 이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여전히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영적 세속성에 물들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양심은 침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만을 위해, 다른 무죄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 요한 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