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단지

호산나

by 진동길


# 구석(九錫)

고대에는 황제가 공을 세운 제후들에게 베푸는 아홉 가지 특전이 있었다고 하지요. 이를 두고 구석(九錫)이라고 했는데요. 모두 황제의 격식에 준했습니다.

•거마(車馬): 행차할 때 항시 두 대의 수레가 움직인다.

•의복(衣服): 곤룡포와 면류관을 착용하고 붉은색 신발을 신는다.

•악기(樂器): 조정이나 집에서 음곡(音曲)이나 가무(歌舞)를 감상하는 것을 허용한다.

•주호(朱戶): 거처하는 집 대문과 나무기둥에 붉은색을 칠하도록 한다.

•납폐(納陛): 궁중에서 신발을 신고 전상에 오르내릴 수 있다.

•호분(虎賁): 황제처럼 늘 곁을 따라다니며 호위하는 3백 명가량의 병사를 사사로이 부릴 수 있다.

•궁시(弓矢): 붉은 활 한 벌, 붉은 화살 백 개, 검은 활 열 벌, 검은 화살 3천 개를 하사하는데 언제든지 역적을 마음대로 처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는 상징이다.

•부월(斧鉞): 왕의 의장행사에 쓰이는 도끼로 역적을 마음대로 토벌해도 좋다는 권한의 상징이다.

•거창규찬(秬鬯圭瓚): 거창(검은 수수로 빚은 술)과 규찬(옥으로 만든 제기)을 조상의 제사에 사용할 수 있다.

이처럼 구석을 받은 사람은 의전상 황제의 지위에 버금가는 격식을 받았습니다. 웬만큼 큰 공을 세우지 않는다면 감히 생각해보기도 어려운 특전이지요.

# 호산나(ὡσαννά)

이제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전통적으로 이 주간을 “성대 주간”(Hebdomada major)이라 했는데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 주간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죽음이 소멸되며 저주가 사라지고 악마의 노예살이가 종식되어 그에게 빼앗겼던 모든 것을 찾게 된다.
또한 하느님께서 인간들과 화해하시고 하늘의 문이 열리며 인간들과 천사들이 하나로 일치된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을 평화롭게 하신다.”(In Genesis Homil. 30 in PG 29,273-274.)

하느님께서 이루신 위대한 일들로 이 주간은 ‘승리’의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인간에게는 무한한 영광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이스라엘 군중에게 승리의 임금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공을 세운 제후들처럼 ‘구석’을 갖추시지 않셨습니다. 오히려 금수레 대신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드러내기 좋아하고 자랑하고 싶어 하는 우리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갖출 것 다 갖추어 입은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얼굴을 들고 그분을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승리의 길을 가고 계시지만 그분은 자신을 위해 곤룡포도 입지 않으셨고, 옷깃에 옥을 달지도 않으셨습니다.

금도끼, 은도끼를 들어 왕의 의장을 갖추시지도 않으셨습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신 우리의 임금. 너무도 초라하게 나귀를 타고 오시는 존귀한 임금이십니다. 나귀를 타고 오시는 이분이 우리의 임금이십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그분 앞에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열과 성을 다해 환호합시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쁨과 환호의 순간이고 이 행렬은 주님의 개선행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루카 19,40.)

ὡσαννά! ὡσαννά! (호산나! 지금 구하소서! 부디 도와주소서! 구해 주소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르 11,9-10.)

# 기쁘고도 슬픈 우리의 자화상

오늘은 "기쁘고 동시에 슬픕니다. 우리는 주님을 왕으로 찬미하는 제자들의 환호 속에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경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엄숙하게 주님 수난의 복음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 가슴 아픈 대조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친구들과 함께 기뻐하셨고 예루살렘을 두고 우셨듯이 그날 틀림없이 당신 자신이 마음속으로 느꼈던 것을 조금은 헤아리는 경험을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2017년 성지주일 강론에서)

우리는 기쁨에 넘쳐 우리의 왕을 찬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하신 말씀을 또한 뼈 속 깊이 묵상합니다. 그분께서 이 주간에 견디셔야 하는 고통들을 바라봅시다.

모욕과 중상, 야유와 배신들, 부당한 심판으로 버림받으시고 무자비한 손찌검과 채찍질 그리고 가시관을 쓰신 그분을 바라봅시다. 마침내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군중들은 무엇을 보고 환호하고 기뻐했습니까? 또 우리는 무엇을 보고 환호했으며 기뻐했습니까? 군중에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신의 사랑입니까?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축복이고 무엇이 승리입니까?

신의 자녀가 된 여러분 신과 같은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파견되신 여러분. 여러분에게 무엇이 최종적인 목적이고 완성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이루기 위하여 생명을 지키고 계십니까?

# 주님의 종

우리는 학대당하는 의인(義人)의 모습을 예수님 안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 50,6.)

‘주님의 종의 노래’[42,1-4(5-9); 49,1-7(8-13); 50,4-9(10-11); 52,13-53,12]에서 우리가 만난 종은 극심한 ‘모욕, 수모, 고통, 굴욕’ 속에서도 주 하느님께서 도와주고 계심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 앞에 닥친 운명을 거역하지도 않고 빠져나갈 길을 도모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의 얼굴은 주 하느님께로 향한 채, 자신에게 닥치는 악에 의연히 맞섭니다.

그분은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7-8.)

그분은 스스로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분은 극심한 고통과 절망 중에서도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42.44.)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리 2,9.)

# 아버지의 뜻대로

수난기를 통해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 일어난 모든 일이 악한 일도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이었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 모든 것을 미리 알려놓으셨는데, 그 하느님의 뜻이 예수님을 통해 모두 이루이지지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암나귀와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것은(마태 21,5; 마르 11,1))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와 이사 62,11)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신이 붙잡혀 수난을 당하시게 된 것은(마태 27,11-54.; 마르 15,1-39.; 루카 23,1-49.)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 떼가 흩어지리라”(즈카 13,7)고 말씀하신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 위함이었습니다.

한편 유다가 배반한 것마저도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함이었습니다.(마태 27,9) “예언자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마태 26,5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도 이 점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면서 이 점을 다시 한번 밝히시며, 모든 일이 아버지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내어 맡기십니다.

# 종이 된 사랑

예수님께서 아버지 뜻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기셨다는 이야기는 모든 복음서가 다 언급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사를 두 번에 걸쳐 강조하는 것은 마태오 복음서가 유일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마태 26,39), “아버지의 뜻”(마태 26,42)이라는 표현을 통해 십자가 죽음이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왜 십자가 죽음에 넘기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거행한 최후의 만찬에 관해서는 마르코 복음서(마르 14,22-26), 루카 복음서(루카 22,14-20), 코린토 1서(1코린 11,23-25)가 모두 이야기하지만,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 고유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려고” 계약의 피를 흘리셨다는 표현입니다.

마태오 복음서 수난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를 통해 많은 이들의 죄를 씻고자 하셨던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며 목숨을 내어놓으신 메시아이십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피를 흘려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며 근심과 번민에 휩싸이기도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과 함께 깨어 있어 달라고 청하기도 하셨습니다.(마태 26,38) 그리고 당신에게 주어지는 잔을 피하고 싶다는 유혹을 겪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잔을 기꺼이 마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당신의 계약의 피를 기꺼이 흘리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분의 새로운 계약의 피로 인해 죄를 용서받고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들에게 요구하십니다. 제자들처럼 잠들어 있지 말고 깨어서 기도하며 각자에게 주어지는 아버지의 뜻, 곧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맞아 우리도 예수님처럼 각자의 십자가가 놓여있는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갑시다. 피하고 싶은 유혹이 들겠지만, 그런 유혹에 빠지지 말고 많은 이를 위해 우리의 피를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당신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 모두를 영원한 예루살렘, 곧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천상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 그들처럼

당신이 키레네 사람 시몬이라면,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리스도를 따르십시오.

당신이 그 강도처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면, 그 착한 강도처럼 하느님께 의탁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당신의 죄 때문에 죄인으로 취급당하셨다면, 당신은 그분을 위해서 의인이 되십시오.

당신이 자신의 과오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있으면, 당신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을 경배하십시오.

당신의 죽음으로 구원을 사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서, 죄로 인해 잃었던 그 천상 상급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아보십시오.

그곳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비방하는 자는 그가 주는 모독과 함께 밖에서 죽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당신이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라면, 사형 집행인에게 유해를 달라고 청하여 온 세상을 위한 그 속죄물이 당신의 속죄물이 되게 하십시오.

당신이 밤중에 하느님을 경배했던 니고데모라면 향료를 가지고 와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십시오.

당신이 마리아 또는 다른 마리아, 또는 살로메, 요안나라면 이른 아침부터 눈물을 흘리며 돌이 굴려 나 있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보고 천사도 보며 예수님까지 볼 수 있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파스카에 참되게 참여하는 것입니다.

-나지 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의 강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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