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마고르(두려움) 미(전치사)+싸빕(사방)’이라는 말의 합성어인데요. ‘사방이 두려움이나 곤란으로 둘러싸여 있는 상황’을 말합니다.
옛 번역에서는 ‘사면초가’로 의역했습니다. ‘사면초가’ 혹은 ‘사방에 공포’라는 이 말은 군중들이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붙여준 별명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듣기 거북해하고 싫어하는 주님의 말씀을 언제나 입에 달고 살았던 예레미야. 결국 그의 별명은 ‘마고르 미싸빕’이 되었습니다. 군중들은 쓴소리만 골라서 말하는 예레미야를 고발하고 복수하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느님께 하소연하며,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고백을 합니다.(예레 20,10.12)
오늘 예수님께서도 예레미야 예언자의 신세처럼 돌을 집어던지려는 유다인에게 둘러싸입니다.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좋은 일을 많이 하셨지만, 오늘 유다인들에게서 보여지는 태도는 예수님을 이해하고 감싸 주는 이는 없어 보입니다. 모두 예수님을 위협하고 죽이려고 벼르는 사람들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들이 겪었던 고통과 위협을 고스란히 받고 계십니다.
# 신성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요한 10,36)
예수님의 분명한 ‘자기-신원-의식’입니다. 만일 유다인들이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았더라면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었겠지요. 그러나 오만과 편견으로 가려진 그들의 눈으로는 예수님에게서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일을 볼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베엘제불의 힘을 빌렸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마태 12,24)
우리의 처지를 묵상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으로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신성을 옷 입듯이 입은 것이지요. 그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1 요한 4,12.)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요한 10, 34-35)
기쁜 말씀을 전하고 그분의 일을 하는 것. 그것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일이며, 하나이신 분의 성사가 되는 것임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임을 되새깁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당신의 거룩함으로 부르십니다. 거룩한 초대입니다. 성사를 통해 그분과 하나임을 확인할 수 있는 날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