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단지

그의 사랑이 내게로 왔다

by 진동길


# 새로운 세상

그의 말이 내게로 왔다.
그의 마음이 내게로 와서
꽃이 되고 바람이 되고 세상이 되었다.

# 그의 말

언어는 때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오래도록 되살리고 싶은 따뜻함으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그의 말들은 때가 차면 내 안에서 꽃을 피우기도 하고 바람을 일으키도 하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기도 합니다.

어제는 하느님의 천사가 소녀를 찾아왔습니다. 한 처음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말씀을 품에 안고 왔습니다.

말씀은 곧 소녀의 기도와 하나가 되었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소녀와 다른 말, 소녀와 다른 기도를 하는 이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언어는 매우 폭력적이고 그들의 생각은 자기 안으로 닫혀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마다하고 오히려 그 사랑을 없애려 합니다.

# 담긴 물과 흐르는 물

불평불만을 입술에 달고 사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사에 우울했고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마을의 현자를 찾아갔습니다. 자신도 그런 자기가 싫어서 변하고 싶었습니다.

청년을 평소에 눈여겨보았던 마을의 현자가 물 한 잔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가 물을 떠 오자 소금 한 줌을 건네며 타서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지요.

“물맛이 어떠냐?”

“에이 퇘. 퇘. 너무 짜서 마실 수가 없습니다.”

현자는 그를 시냇가로 데리고 갔습니다. 아까처럼 소금 한 줌을 시냇물에 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시게 한 뒤 묻었습니다.

“물맛이 어떠냐?”

“시원합니다.”

“소금 맛이 나느냐?”

“전혀 나지 않습니다.”

현자는 말합니다.

“불행의 양은 누구나 똑같단다. 다만 그 불행을 어디에 담느냐에 따라 불행의 크기가 달라진다. 유리잔이 아니라 시냇물이 되어라.”

# 말을 사니 마부를 부리고 싶더라.

멕시코 어느 마을에는 온천과 냉천이 솟아나는 아주 신기한 곳이 있습니다. 이 온천과 냉천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요?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빨래를 들고 와서는 온천에서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 헹군 뒤에 깨끗해진 옷을 집으로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외국 관광객이 자신을 안내하는 멕시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정말로 좋겠습니다. 찬물과 더운물을 마음대로 거저 쓸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큰 선물에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멕시코 안내원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합니다.

“감사한다고요? 천만에요. 감사하기는커녕 비누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이 훨씬 더 많습니다.”

# 마고르 미싸빕

‘마고르 미싸빕(מָגֹ֖ור מִסָּבִֽיב)’: (예레 6,25; 20,3.4.10; 46,5; 49,29; 시편 31,13)

이 말은 ‘마고르(두려움) 미(전치사)+싸빕(사방)’이라는 말의 합성어인데요. ‘사방이 두려움이나 곤란으로 둘러싸여 있는 상황’을 말합니다.

옛 번역에서는 ‘사면초가’로 의역했습니다. ‘사면초가’ 혹은 ‘사방에 공포’라는 이 말은 군중들이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붙여준 별명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듣기 거북해하고 싫어하는 주님의 말씀을 언제나 입에 달고 살았던 예레미야. 결국 그의 별명은 ‘마고르 미싸빕’이 되었습니다. 군중들은 쓴소리만 골라서 말하는 예레미야를 고발하고 복수하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느님께 하소연하며,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고백을 합니다.(예레 20,10.12)

오늘 예수님께서도 예레미야 예언자의 신세처럼 돌을 집어던지려는 유다인에게 둘러싸입니다.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좋은 일을 많이 하셨지만, 오늘 유다인들에게서 보여지는 태도는 예수님을 이해하고 감싸 주는 이는 없어 보입니다. 모두 예수님을 위협하고 죽이려고 벼르는 사람들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들이 겪었던 고통과 위협을 고스란히 받고 계십니다.

# 신성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요한 10,36)

예수님의 분명한 ‘자기-신원-의식’입니다. 만일 유다인들이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았더라면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었겠지요. 그러나 오만과 편견으로 가려진 그들의 눈으로는 예수님에게서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일을 볼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베엘제불의 힘을 빌렸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마태 12,24)

우리의 처지를 묵상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으로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신성을 옷 입듯이 입은 것이지요. 그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1 요한 4,12.)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요한 10, 34-35)

기쁜 말씀을 전하고 그분의 일을 하는 것. 그것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일이며, 하나이신 분의 성사가 되는 것임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임을 되새깁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당신의 거룩함으로 부르십니다. 거룩한 초대입니다. 성사를 통해 그분과 하나임을 확인할 수 있는 날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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