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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단지
당신을 봅니다
by
진동길
Apr 5. 2021
# I see you!
아프리카 줄루족의 인사말은 독특해서 "사우 보나!(나는 당신을 봅니다)"라고 말하면 인사를 받는 편에서 "시크 호나!(나는 여기에 있다)"라고 응답한다고 하지요.
오늘 이 인사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당신이 나와 함께 머물고 있어도 당신이 나를 보아주지 않는 이상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가까이하기에 두려워서. 상처 받기 싫어서. 코로나를 핑계로 가까운 사람들까지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내가 누구인지 그가 나를 알아주기 전에 내가 먼저 형제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해받기보다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 먼저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해봅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뵙니다.
# 마리아야!
마리아는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큰 슬픔에 잠겨있습니다.
비워진 무덤을 함께 확인했던 두 제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차마 무덤 곁을 떠나지 못하고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사랑을, 아픈 사랑이 마리아의 걸음을 쉽게 옮기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움과 슬픔은 더해져 갑니다.
너무도 큰일을 당하면 때때로 정신 줄을 놓을 때가 있지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을 보고는 ‘넋을 잃었다’, ‘혼이 나갔다’고 말하는데, 마리아는 넋이 나간 듯합니다. 혼자 망연히 서서 울고 있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지 미루어 짐작하게 합니다.
# 라뿌니(ῥαββουνί, רַבּוּנִי, “my master”)
한 음성이 들립니다. 울고 있는 여인에게 찾아온 목소리입니다.
“여인아(γυνή, Woman),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처음에 그 목소리는 울고 있는 그녀를 여인으로 불렀습니다. 이름 없는 여인. 목소리의 주인과 아무런 관계없는 여인으로 부릅니다.
그녀 또한 그 목소리의 주인을 정원지기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아무런 관계없는 정원지기를 대하 듯, 돌아보지도 않고 말합니다.
“선생님(κύριος, Sir),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마리아야(Μαρία)!” 하고 부르십니다. 그제야 그녀는 돌아서서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는 기쁘고 들뜬 소리로 응답합니다.
“라뿌니(רַבּוּנִי)!”
그분이 살아 계실 때, 그분에게만 쓰던 존칭어로 그분을 다시 부릅니다.
“라뿌니(רַבּוּנִי)!”
아람어로 “라뿌니”라는 호칭은 내 사랑, 나의 소유주, 임자, 가장, 교장, 선생님이라는 뜻을 가진 존칭어였습니다.
부르는 이에 따라 의미가 사뭇 다를 수 있겠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을 큰 존경심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라뿌니(רַבּוּנִי)!”
라고 불렀을 테지요.
‘나의 소유주시여! 나의 주인이시여! 나의 임자이시여!
# 영원한 타자, 그 불편한 이름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이 하느님과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학연, 지연과 같은 인연의 줄을 좋아하는 우리와 다르게 그분은 언제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와 다르지 않게 대하십니다. 반대로 그분은 또 모두를 대하실 때에도 한 사람 한 사람처럼 귀하게 대하시지요.
때문에 신학은 그분을 영원한 손님, 영원한 타자, 절대 타자라고 칭하는가 봅니다.
주님은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마리아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도 스승님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마리아의 탓인데요. 그녀는 여전히 인간 예수를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덤에 묻힌 인간 예수, 죽은 예수 그 사람 말입니다.
사실 모든 제자들을 포함해 사제들과 원로들, 예수님을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는 이제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찾으려면 죽은 사람 가운데서 찾아야 했습니다.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찾고 있는 그분의 신원. 그분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역시 그랬고(루카 24,13-35)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일곱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요한 21,4)
하느님은 인간에게 ‘영원한 타자’이자 ‘낯선 이’로 체험됩니다. 나보다 더 가까이 계시지만 동시에 그분은 아주 멀리 계십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내 마음은 그분을 가장 두려워하는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내 영적 갈망은 그분의 이름을 애타게 찾지만, 내 인간적 욕망은 불편한 진실을 거부하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처럼 ‘낯선 타자’. 불편한 그분의 또 다른 이름.
“라뿌니(רַבּוּנִי)!”
'낯선 이'는 오늘도 내게 무엇인가를 청합니다. 무엇인가를 도와달라고 손을 내밉니다. 그대의 손이 필요하고 그대의 마음이 필요하고 그대의 기도가 필요하다고. 도움을 청하는 타자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라뿌니(רַבּוּנִי)!”
불편하게도 ‘낯선 이’는 오늘도 상처 받고 버려진 이의 모습으로 나를 찾을 것입니다. 무력하고 무능한 십자가를 지고, 가난하고 아픈 이,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이, 가련하고 슬퍼하는 이의 모습으로 나를 찾으시겠지요. 불편한 존재.
“라뿌니(רַבּוּנִי)!”
# 광야에서
그리스도인의 부활 체험은 ‘낯선 이’ 안에서 아버지를 만납니다. 제자들의 부활 체험은 ‘낯선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제는 내가 아는 죽은 예수를 떠나보낼 수 있기를.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기에.
부활 체험은 내가 모르는 나와 '낯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죽음의 문 앞에서 무덤가에 서서 더 이상 슬퍼하지 않기를. 죽지 않고 살아계신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기를.
“라뿌니(רַבּוּנִי)!”
사랑은 생명이며 영원히 살아있기에 '영원한 타자'이신 그리스도. 그 음성에서 아버지를 만나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광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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