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단지

나와 너, 우리 사이에

by 진동길


# 어디로? 무엇을 찾아가는 길인가?

사람의 삶을 크게 들여다보고 있자면 ‘어디로? 무엇을 찾아가는 길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소망하고 기대했던 일들이 한순간에 허무하게 스러져 흩어져버릴 때에는 ‘지금껏 걸어왔던 이 길이 올바른 길이었던가?’라는 자문에 때로는 후회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릴 때도 있습니다.

믿고 의지하며 따르던 스승이 어느 날 죄수로 몰리더니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했지만 끝내 십자가 형을 당해 죽으시고 묻히셨습니다.

더더욱 그 시신까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직 스승의 신원과 그분의 참뜻을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의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만 하는 것인지. 막막함에 방황하게 됩니다. 더 이상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또 어떤 불똥이 튈지 모르는 상황이라 서둘러 예루살렘을 떠나는 편이 지혜로운 선택 같아 보입니다.

# 예수의 복음적 사회와 천국

예수는 진정 그의 이상이었던 '복음적인 사회'와 '미완의 천국'을 포기했는가?

예수는 그의 이상이었던 '복음적인 사회'를 일찍이 포기했다. 또 그가 그토록 기도하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인 '천국'도 그의 생전에 보여주지 못했다.

아니 그런 듯했다. 그들도 그렇게 믿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패배자이자 사형수로 죽음을 맞았다. 예언대로 요한의 증언대로 구세주가 메시아가 강생했지만,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오히려 사랑했던 제자들로부터 배신의 상처만 받았고 십자가 위에서는 절망과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의 복음적 이상과 천국에 대한 희망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아니 그런 듯했다. 그들도 그렇게 믿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אלי אלי למה עזבתני" (마태 27,46)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예수는 인간과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려졌다. 그들도 그렇게 인간과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저버렸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살려달라 울부짖는 소리 들리지도 않사옵니까?"(시편 22, 1)

정말, 십자가 위에서는 예수도 그렇게 외쳤다. 그들도 그렇게 믿었다.

스승을 십자가에 매달며 그를 저주한 인간들과 그 공포스러운 절망 중에도 침묵하시는 아버지에게서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희망과 천국을 말할 수 있었겠는가? 제자들은 철저하게 신과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예수는 진정 '복음적인 사회'와 '미완의 천국'을 포기했는가?

아니 그런 듯했다. 그들도 그렇게 믿었다.

과연 그가 부르짖던 '복음적인 사회'와 '천국'이라는 허망하고 유명무실한 언어가 세상에 남아있을 필요가 있을까? 복음과 천국을 위해 제자들을 뽑아세웠고 그 공동체를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던 그가 허망하게 죽어버렸으니 말이다. 먼지만 쌓인 성경의 예언은 냉정하고 잔혹한 이기적 현실에서 무의미하고 쓸데없었다.

정말 그런 듯했다. 그들도 그렇게 믿었다.

그의 행복 선언과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그 공동체에서조차 이해받지 못했고, 자주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왔으며, 다분히 비현실적이었다.

그래 그랬다. 그게 현실이었다.

기행에 가까운 그의 언행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당혹스럽게도 순진무구하고 단순한 그의 성품은 때때로 제자들을 당황케 했고, 타협할 줄 모르는 무모함은 당시 정치 종교 지도자들까지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는 세상 이치의 근간을 이루는 시장경제논리까지도 깨부수려는 듯했다.

그랬다. 그것이 그의 진실이었다.

불편한 존재. 불편한 진실. 그의 복음은 어불성설이 되었고 그의 나라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추종자들이 배신하여 그를 십자가에 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십자가에 달린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이유는 그가 가장 신뢰했고 의지했던 ‘인간’. 그 자신들 때문이었다. 예수가 그토록 신뢰하고 사랑했던 인간들 때문이었다.

그랬다. 사실이다.

때문에 예수가 죽었다. 진실은 죽어야 했다. 인간에게서 최소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복음적인 사회'와 '가난한 자들의 천국'은 죽어야 했다. 십자가 위에서.

나자렛 사람 예수는 죽어야 했다. 성경은 새롭게 태어나야 했고 다시 써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 욕구를 넘어 욕망으로 향하는 인간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루카 24,19-21.)

'욕망하는 인간' 그의 본성은 '소유론적'이며 동시에 이기적이다. 생물학적 욕구를 넘어 욕망하는 인간의 지긋지긋한 본성(원죄)은 복음과 천국을 예수에게서 빼앗아버렸다.

그랬다. 사실이었다. 아니 그런 듯했다. 모두가 그렇게 믿었다.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위해서. 스승과 부모까지도 쉽게 저버릴 수 있는 배신의 아이콘 인간. 그들에게서 어떤 희망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예수의 십자가 길을 함께 걸었던 이들조차 그랬다. 모두는 아닐지라도 다수는 그랬다. 그리고 세상은 십자가의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마지막이라고. 예수의 꿈도. 복음적 사회와 천국은 세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도 다수는 그렇다.

예수가 사랑하고 신뢰했던 제자들도 스승을 무덤에 묻고 한동안. 낙향하고 한동안. 다락방에 숨어지면서도 한참 동안 그렇게 믿었다. 천국은 없다고.

복음과 천국은 부활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것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도 비현실적이고 공허한 발상이라고 여겨진다. 이 땅에서 복음과 천국이라는 언어는 부활할 수없다고.

과연 그럴까? 아직도? 여전히 그의 복음과 그의 나라는 부활할 수 없는 것인가?

# 신앙의 위기 가운데에서

내가 죽지 않으면 세상을 먼저 차지한 자들의 것이라 여긴다면. 내 안에 심겨진 하느님의 나라는 시들어 가겠지요.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 선 제자들의 슬픔과 낙담은 지금 나의 현실일 수 있습니다.

삶의 위기이자 신앙의 위기입니다. 그런데 이때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제 그분은 인간이 아니십니다. 인간 예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당신의 신원을 회복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이제 그분은 임마누엘 주님이 되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온 세상에서 우리와 나와 함께 슬퍼하시고 내 멍에를 함께 짊어지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성경의 승리입니다. 예언의 성취이자 메시아의 승리입니다. 상처 받은 구원자. 메시아 바로 그분이십니다.

이제 그분은 내 역사에 귀 기울여 주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할 힘도 주십니다.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그분은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실 수 있습니다. ‘고통의 의미와 가치’를 알려 주실 수 있으시지요. 왜냐면 그분이 그렇게 돌아가셨고 다시 일어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25-26.)

그리고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 30-31)

# 부활의 삶: 성사적 삶: 영광의 삶: 그리스도의 벗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리 2,6-9)

세례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의 삶은 부활의 삶입니다. 부활의 삶은 성사적 삶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삶이 성사적 삶이 되기 위해서는 고통과 절망 가운데에서 다시 일어나 나누어지고 쪼개어져야 하지요. 한 번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야 합니다.

스승의 삶이 그러했듯이 '아버지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삶’입니다. 절망과 좌절의 지점이 끝이 아니고 다시 시작하는 출발의 시간이기에. 부활의 삶은 성사적 삶이자 날마다 다시 태어나는 삶입니다.

날마다 다시 시작하는 삶 속에서 그분이 나와 함께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계심을 선포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삶은 성사적 삶입니다.

비록 내 아픔이 커서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때에도 그분은 날마다 나를 다시 일으키시는 분. 세례로 죽음으로부터 건져내셨고 다시 태어나게 하셨고 이제는 사랑의 삶, 기쁨과 평화의 삶, 복음을 선포하는 삶인 성사적 삶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들. 아버지의 영광과 함께 하는 형제들. 인간이 지혜로운 척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망각의 동물임을 기억합시다. 어리석음 중에 가장 빈번하게 저지르는 과오가 인간은 감정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분명히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헷갈려한다는 것입니다.

시작이시고 마침이신 그분께서 내 인생. 내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고 함께하십니다. 그분이 내게 녹아들어 오셨습니다.

내 역사를 성사로 회복시켜주십니다.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하여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사이에 그분이 계십니다. 임마누엘이 함께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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