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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Apr 25. 2021

소금단지

부르심


# 흙으로 부르심

수도원에는 봄 농사가 한창입니다. 성소주일에 밭으로 부르시는 목자의 소리에 밭으로 나갔습니다.

땅도 깊이 팠고 거름도 충분히 뿌려 준 좋은 밭입니다. 나름 기름진 땅. 깊숙이 고구마 줄기들을 넣어주었습니다.

참 신기하죠? 고구마 줄기를 심어주면 거기서 뿌리가 나고 잎이 난다는 것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훗날 굵고 실한 고구마를 되돌려 받을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화요일부터 비가 온다는 기쁜 소식에 손길이 멈출 시간이 없습니다. 덕분에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지만 일 년 내내 농사일로 식구들의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농부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는 하루였습니다.

내일은 고추와 호박도 땅의 품으로 돌려보내려 합니다. 사람이 제 손에 끓어 안고 있어 봐야 변변치 않은 열매를 맺겠지만, 본래 자기가 가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면 많을 열매를 맺을 수 있겠지요.

때로는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답고 최선일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연을 찾고 또 자연과 함께, 자연 속에 묻혀 살고 싶어 하는 봅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 다 편리하고 좋은 것만은 아니겠지요?

# '목자'와 '문'의 비유

예수님께서 자주 쓰시는 목자와 양의 비유는 당시 유목 생활을 하던 유다인들에게 가장 친근하고 받아들이기 쉬운 비유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문'에 비유한 것은 아주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문은 단순히  '안'과 '밖'을 연결하는 상징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더 깊은 의미로 '생'과 '사', 이승과 저승, 멸망과 구원을 이어주고, 넘나들며 때로는 열리고 때로는 닫히기도 합니다.

또 문은 너와 나를 이어주는 친교의 통로가 되기도 하고 하느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튜브의 시작과 끝이 되기도 하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피난처(퀘렌시아Querencia)이자 안식처로 통하는 비상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문의 상징적 의미를 신학적으로 확장해 보면 문의 의미는 곧 중보자(仲保者, Mediator)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중보자이신 아들을 통해 우리와 화해하실 뿐만 아니라 아들과 함께 은총과 축복을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주권은 아들에게 있지만, 그분은 아버지와 성령과 하이시기에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목자이자 양들이 드나드는 문으로 비유한 것은 올바릅니다. 왜냐하면 도둑은 문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문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요한 10,3.)


# 필연성과 선택적 가능성

예수님께서 당신을 ‘문’으로 비유하신 말씀 신학적으로 좀 더 깊이 성찰해보면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여정에서 문(구원자, 중보자) 필연성과 당위성을 선포하시는 말씀임을 알 수 있는데요. 우리가 어떤 공간을 들어설 때, 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필연적입니다.

또한 문은 출입을 가능케 합니다. 유한하고 닫힌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 볼 때, 무한하고 열린 문은 스스로 신적인 필연성을 정당화합니다. 즉 유한한 인간에게는 구원의 문이 꼭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그 구원의 문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한편 문이 있다는 말은 문이 아 다른 곳, 다른 상황은 유한자에게 닫혀있고 막다른 상황임을 전제로 하지요. 그러므로 문의 상징적 의미는 문을 찾는 이에게만 열리게 되는 필연적이고 선택적 가능성의 여지가 있음을 예고합니다.

'구원에 대한 문'의  필연성과 당위성 그리고 그 문을 믿고 또 찾는 이에게만 허락된 '선택적 가능성'.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중요하고 의미 심장한 당신의 신원을 아주 간단하게 단 한마디 문이란 말로 대변하십니다. 유목민이었던 당신의 백성들이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비유적으로 선언하신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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