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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Apr 26. 2021

소금단지

1+1+1=1


"무슨 일을 하든지 뜻과 마음과 호흡이 서로 맞아야 해."

오늘도 원장님과 한 조가 되어 고추와 호박, 토마토, 옥수수 모종을 심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서로 뜻과 마음과 호흡이 맞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일은 일대로 안되고 힘은 힘대로 들고 서로 마음만 상하게 되지."

원장 수사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하며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할 수 있는 하루였습니다.

"얘들아. 수도원에서 함께 살게 되어서 기쁘다. 병충해 없이 무럭무럭 잘 자라 다오. 파이팅!"


# 양태론(modalism)의 오류

삼위일체(三位一體, Τριάδος; Trinitas)이신 하느님을 설명할 때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가 양태론(樣態論)인데요.

한분이신 하느님께서 모양만 성부, 성자, 성령의 모습을 취하시어, 때에 따라 다른 형식(forms)으로 나타났다는 논리이지요.

문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령의 인격은 사라지고 단일한 신격만 존재하게 되는 데요. 이렇게 되면 가면을 쓴 신과 다르지 않지요. 양태론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입니다.

하느님의 유일한 존재성을 지나치게 과장 변화한 데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양태론(modalism)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한 인격의 하느님이 하늘에 계실 때는 성부로 계셨고, 이 땅에 구속주로 오셨을 때는 성자로 계셨고, 지금 성령의 시대에는 하느님이 성령으로 계신다고 주장합니다. 성부의 수난설을 주장하지요.

더 쉬운 예를 들면 한 아버지가 회사에서 사장이고, 교회에서는 신자이며, 집에서는 가장이 된다는 주장인데요.

삼위이신 하느님에 대한 명백한 오류이지요. 각각의 서로 다른 세 위격을 한 위격으로 단일화하거나 동일화하는 오류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시옵니다. 그러므로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요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 위엄으로는 같으신 분”이십니다.(감사송)

# 신의 역설: 현존재; 초월자

신학이 하느님의 존재방식을 삼위일체라고 하는 이유는 위격은 각각 다른 분이시지만, 한 본성으로서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초월해 계시는 현실태(탈출 13장)이시고 현존재이시며, 절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초월적인 하느님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각각 서로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셨지만, 초월자로서 삼위는 항상 한 본체이셨습니다.

삼위의 하느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와 아들과 그분의 영으로 항상 현재이시며, 처음과 같이 지금처럼 영원히 살아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그 현실태는 ‘황홀함’이자 동시에 ‘두려운’ 존재(이사 6장). ‘아가페 사랑’으로 체험되지만 초월적 존재(요한 1장)입니다. 신의 역설입니다.

# 삼위일체의 관계

비밀스러운 존재이시지만, 동시에 아들과 함께 자기 계시자이신 하느님의 ‘내재적 관계’(본성)는 아가페 사랑에서 현현되지요.

삼위일체의 관계는 서로의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상호-침투(浸透), 상호-훈습(熏習, 페리코레시스: Perichoresis: περιχώρησις) 하시는 관계. 기쁨과 슬픔, 고통과 절망을 서로 나누며, 서로 다른 위격이지만, 한 마음으로 마치 무대에서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사람들에 비유됩니다.

하느님은 서로 사랑하며,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존재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로 스며들며, 서로가 서로에게로 다가가고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셋이지만 ‘나’-‘너’-‘우리’가 하나인 존재.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1+1+1=3이 아니라 1+1+1=1이 되는 관계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 신비체험: 사랑의 관계

인류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각각 서로 다른 ‘사랑의 신비’로 체험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는 신앙의 신비이지요.

하지만 사랑의 신비는 하느님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았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내리사랑의 '계시사건'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드러난 그 사랑은 마침내 우리를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 안으로 초대하셨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존재론적으로 현실이지만 그분의 현재성은 역설이며, 그 사랑은 신비입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 14,9).

삼위일체는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입니다. 그 체험은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비로운 사랑’이고 피조물에 대한, 특히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황홀하지만 동시에 두려운 신비, 그러나 조건없는 사랑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체험 말이지요.

사도들은 예수님에게서 아버지 하느님과 같은 초월적 사랑, 아가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인간 역사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해 구체적으로 체현된 아버지의 사랑. 그것은 신비였습니다.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 그리고 아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밝히 드러낸 사랑. 그것은 역설적 신비였습니다.

그 신비로운 사랑이 여전히 성령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교회와 전례와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을 신비롭게 열어 보이십니다. 나보다 더 나와 가까이에서 나를 마주하시는 사랑. 그 사랑은 신비입니다.

# 사랑의 신비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아버지와 같은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도들에게 전해졌고('원체험'), 이 사랑은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은 사랑으로 각자의 일상에서 '거듭 체험'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사랑의 신비'로 말이지요.

참사랑은 자신 안에만 머무를 수 없기에. 자녀들을 향하여 열려 있습니다. '너'에게로 가서 '나'를 내어 줌으로써 관계를 맺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삼위일체라는 '사랑의 신비'로 말이지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8-9.12.)

삼위일체. 그 신비한 사랑은 완벽한 내어줌. 완벽한 상호 증여로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다 이루어졌다." 하신 그 사랑.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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