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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Jun 14. 2021

소금단지

원수를 사랑하라


#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ἀγαπάω ὁ ἐχθρός σύ."

 "love your enemies."


ἐχθρός에크드로스 (1.적개심이 있는 2.미움을 받는 3.미워하는)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미워하는 이를 ἀγαπάω(아가파오) 하라." 말씀하십니다. 즉 미워하는 이를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아가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지요.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하셨는데요. 라틴어 원문 "Cum dilectione hominum et odio vitiorum."을 영어로는 "With love for mankind and hatred of sins."입니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죄를 미워하라."인데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한 말로 전해지는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죄를 미워하라."는 두 가지 말씀을 묵상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예수님께서 원수라 하신 그가 누구인가? 심리학과 여러 학문의 도움을 받고 있는 현대 신학은 원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또 가톨릭 교리는 원수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 가시나무를 쥔 사내


짙은 먹구름이 한바탕 비를 쏟아놓을 것 같은 하늘 아래. 멀쩡히 앞서 가던 한 사내가 가시가 잔뜩 나 있는 나뭇가지를 손에 꽉 쥐고 있으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 손이 너무 아파요. 가시에 찔렸어요. 너무 고통스러워요."


우연히 그 길을 지나가던 나그네는 당황스러워합니다. 하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시나무를 쥔 손을 펴세요."


하지만 그 사내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다시 똑같은 말을 합니다.


“아! 손이 너무 아파요. 가시에 찔렸어요. 너무 고통스러워요."


보다 못한 나그네가 다가가서 가시나무를 움켜쥔 그 사내의 손을 강제로 펴주려고 하자 사내는 있는 힘껏 손을 움켜쥐며 대뜸 화를 냅니다.


"왜!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거요. 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요? 남의 일에 참견 말고 가던 길이나 가시오."


너무도 황당한 사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그네는 적반하장이라는 생각에 "아니 나는 당신을 도와주려고 하는 거 아니오? 그 손을 놓으시오."


"아이참! 왜? 자꾸 남의 일에 참견하느냐 말이야. 왜. 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남의 일에 참견 말고 가던 길이나 가라니까."


이제 사내는 나그네에게 반말까지 해대며 화를 내었습니다. 그러자 나그네도 화가 났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몸싸움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싸움이 끝나도 이제 이 두 사람은 원수지간처럼 지내겠지요?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됐을까요? 누가 잘못을 했고,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요?  


흔하지 않은 이야기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가정의 이야기이고 내 직장의 이야기입니다.


# 상처 받은 감정 후벼 파기


×× 고등학교에서 돌아온 딸이 어디서 맞았는지 얼굴에 멍이 들고 입술이 터졌습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온 몸이 쑤시고 아프다고 합니다.


엄마는 갑자기 화가 납니다. 가슴이 미어터지지요. 사내도 아니고 딸아이의 얼굴이 저렇게까지 된 이유와 그 원인을 알고 싶습니다.


하지만 딸아이는 엄마가 알고 싶은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아프다고만 합니다. 급기야 속이 터지는 엄마가 딸아이를 몰아세웁니다.


"아이고! 이년아.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했길래... 누구냐? 엉? 누구야...? 가자!  지금 당장 가서 손해배상 청구를 하든 형사고발을 하든지 하자."


딸아이는 지금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플 텐데 엄마는 다짜고짜 딸아이에게 화를 내며 닦달합니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꾸 왜 그래?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둬. 제발..."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에 엄마는 더 화가 납니다.


"이년이 어디서 배워먹은 말버릇이야. 엉?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치던? 엄마가 모르긴 뭘 몰라? 평소에 네가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까 어디서 어떤 사내놈한테 실컷 두들겨 맞고 왔구먼. 말해봐. 엄마 말이 맞지? 아이고... 내가 못 살아. 하는 짓이 꼭 지애비를 닮아가지구..."


딸아이는 실망과 분노에 가득 찬 얼굴을 엄마에게 보여 주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맙니다. 이제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못하겠지요.


상황이 이쯤 되면 더 이상 엄마와 딸의 관계는 지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상황이 더 악화된다면 앞으로 이 두 사람은 원수 아닌 원수처럼 지내게 되겠지요.


# 기습 폭격을 당한 아이


사람으로 붐비는 은행에 다섯 살쯤 된 아이와 엄마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루해진 아이는 응석을 부리지요.


엄마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엄마의 허벅지를 툭툭 치며 떼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그때 갑자기 정색을 한 엄마가 아이의 뺨을 때립니다. 사전 경고 없이 원자 폭탄을 맞은 듯한 아이는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한테 폭행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과 순간에.


아이는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합니다. 울음이지요. 그런데 어라? 상황이 더 악화됩니다.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전혀 뜻밖의 상황이 계속됩니다. 엄마의 손지검 말입니다. 보통 때는 자기가 울면 달래주던 엄마의 따뜻한 손이었는데.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아이는 서럽고 분하고 고통스럽고 공포로 가득한 울음을 그칠 수가 없습니다.


"엄마 그만해... 엄마 왜 그래..."라고 말을 할 수 있으면 좋으련 말을 못 하는 아이는 계속 엄마에게 매달리며 울어댑니다.


하지만 엄마는 사람들로 붐비는 은행에서 자기와 아이에게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소위 쪽 팔립니다. 빨리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 더 큰 힘으로 아이의 빰을 때립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아이는 더 크게 울지요. 엄마는 또다시 수차례 뺨을 때립니다.


지금 이 엄마는 아이에게 지울 수 없는 엄청난 트라우마를 선물하고 있습니다. 아이의 기억과 마음에 영원히 잊히지 않을 핵폭탄을 투하하고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폭탄입니다. 지금 이 순간 아이에게 원수는 누구일까요?


# 누가 원수(ἐχθρός)인가?


세 가지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나쁜 사람들일까요? 정말 원수들일까요?


위의 두 엄마에게 만일 누군가 "당신은 당신의 아이를 사랑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아이의 엄마들은 발끈하며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내 목숨보다 소중한 아이예요."라고 말할게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엄마와 아이의 뺨을 때리거나 딸에게 함부로 말하는 엄마, 둘 중에 어느 쪽이 진실이고 진심일까요?


분명 두 가지 상황에서 두 가지가 모두 진실이고 진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는 누구일까요?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미워해야 할 대상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의 공공의 적. 원수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죄를 낳는 우리 내면의 두려움과 상처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트라우마 포함한 인간 내면에 보이지 않는 복합적이고 심리적인 원수 말이지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아래 글에서 소개하는 두 개의 아티클은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트라우'에 대한 기사입니다.


# 트라우마


심리학에서 정신적 외상인 트라우마는 정신과 심리가 산산조각 난 상태와 같다고 합니다.


정신분석가 권혜경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자신뿐 아니라 3대에 걸쳐 100년 이상 그 상처가 대물림됩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식민지배, 6ㆍ25 전쟁, 민주화 항쟁으로 인한 상처가 아직도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국민들이 받은 정신적 충격과 유가족들의 상처도 지금 제대로 치유하지 않으면 또 다른 트라우마가 될 것입니다.


심리치료와 정신질환 치료에 가장 효과적인 약은 바로 ‘사람’입니다. 누구든 큰 사건을 겪을 때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고 나 혼자 감당한다고 생각하면 트라우마와 같은 아픔을 겪게 됩니다.


우리 사회도 상처 받은 이들이 사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더불어 살 수 있도록 전문적이고 폭넓은 도움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신분석가 권혜경 박사, 가톨릭평화신문에서-


# 트라우마가 상처를 대물림한다


트라우마 가족치료 연구소장 최광현 한세대학교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일부러 가족에게 상처를 주려는 사람은 없다. 의도하지 않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데, 대개 어린 시절의 경험에 원인이 자리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에겐 어린 시절 고통을 반복하려는 강박이 있어서 부모의 불행을 반복하기 쉽다.


저자는 “어린 시절 불행한 가족관계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성인이 되어 과거의 경험을 재현한다”며 “불안하게 매를 기다리기보다 차라리 매를 맞는 순간이 편안한 것처럼 즐거움, 행복감을 느끼면 너무나 불안해하면서 일부러 불행한 느낌, 고통, 불안한 감정으로 달아난다”라고 진단한다.


어린 시절 상처에 따른 트라우마는 다양한 형태로 발현된다. 성학대, 폭력, 몰인정 등은 외로움, 슬픔, 불안, 두려움, 분노, 우울과 같은 그릇된 감정을 낳아 부부 관계는 물론 자녀 관계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 “부부 각자의 낮은 자존감은 소통을 어렵게 하고 그래서 갈등을 일으키며 다시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는 일”도 생길 수 있다.


또한 상처가 깊어지면 현실 도피를 위해 “‘지금 여기’의 몸을 떠나는” 중독에 빠지기 쉽다. 저자는 “대부분의 중독자들은 저마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갖고 있다”며 “아프고 고통스러운 감정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어 중독 행위를 선택한다”라고 말한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서는 트라우마의 근원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대개 트라우마에 따른 현상에 초점을 맞출 뿐 그 원인에는 (고의로) 무감각한 경우가 많은데, 저자는 그 트라우마와 ‘직면’할 것을 강조한다. -서믿음, 독서신문에서-


# 눈에 보이지 않는 원수


인류는 그동안 '원수'를 눈에 보이는 대상으로 특정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는가 성찰해 보아야겠습니다.


'원수'를 눈에 보이는 대상으로 조준하면 여러 가지 복잡한 과정이 생략되기 때문에 판단하고 비판하기 쉽습니다.


중세 중기부터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마녀 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무자비한 인간 사냥이 그 대표적인 예이지요.


물론 한국 사회도 그렇습니다. 권력을 쥔 이들이 소수의 특정인들을 빨갱이라는 이름을 붙여, 공공의 적이나 '원수'로 내몰아 사냥했던 일들이 비일비재했지요. 제주 4·3 사건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에 대한 본래 의미를 다시 재정립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서두에서 살펴보았듯이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한 말로 전해지는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죄를 미워하라."는 두 가지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제는 원수라는 표적이 인간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현대 신학도 이제는 더 이상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사냥하는 행위에 침묵하지 않습니다.


구세주의 십자가 죽음이 가져다준 참 의미를 깨달은 교회도 새 법, 곧 복음의 법을 통해 "복음 정신에 따른 해방은, 원수인 그 사람에 대한 증오와는 양립될 수 없지만, 원수인 그 사람이 행하는 악에 대한 증오와는 양립될 수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참조:가톨릭 교리서 1929-1933.)


그러므로 죄를 낳는 원수에 대한 신학의 시야는 이제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으로 옮겨가야겠습니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레위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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