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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Jun 27. 2021

소금단지

탈리타 쿰


인류 고 작은 사건과 상황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도 시간과 함께 우리가 상상하기조차 힘든 커다란 맥락이 흐르고 있고 알 수 없는 힘과 의지가 숨겨져 있다. 영원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그것은 섭리자의 뜻이자 다스림이다.


# ‘탈리타 쿰’ - 두 여인


두 여인의 이야기가 포개져 있습니다. 복음이 전하고 있는 두 여인은 모두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의 상징적인 인물들입니다.


한 명은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소녀입니다(루카 8,42). 다른 한 명은 열두 해 동안 피 흘리는 병을 앓으며, 숱한 고생 속에 수많은 의사들을 찾아다녔지만, 고치지 못하고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병세는 더 악화된 혈루증에 고통을 당하는 여인입니다(마르 5,25-6; 루카 8,43).


열둘이라고 하는 상징적인 숫자가 반복되어 사용된 까닭은 이 여인들의 아픔이 (나이와 병의 상태와 상관없이) 두 사람의 고통이 아닌 당시의 모든 여인들을 겪어야 했던 절망적인 현실을 대표한다고 보아야 옳을 것 같습니다.


# 천벌 받은 여인


유다 사회,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수많은 군중이 따르는 스승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에는 그녀에게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자라는 자신의 성별과 ‘부정 탄 병’(레위 15,25)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은 공동체나 사회에서 힘이 없고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유다인들의 눈에 그녀는 저주받은 존재였고, 외로웠으며, 의존적인 존재로 보였습니다. 그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상징적인 12년) 나날들을 고통 중에 있었고, 잔인한 인생이었습니다. 스스로도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라 여기기도 했겠지요.


그녀는 자신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심하게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마르 5,27) 다가갔습니다. 여인은 군중 속에 자신을 감추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숨긴 채 ‘구원자’ 예수님의 뒤로 다가갔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몸을 만질 용기도 없었습니다. 겨우 구원자로 믿고 있는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강점이 한 가지 있었지요.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는 강력한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을 절망 가운데 있었지만, 헤아릴 수 없는 나날들을 고통과 불행한 처지에 시달렸지만, ‘구원’[救援, salvatio, יְהוֹשֻׁ֣עַ(예수와): ⓵ 위험이나 곤란에 빠져 있는 사람을 구하다 ⓶ 죄와 고통과 죽음에서 건져 내다]에 대한 희망만큼은 잃지 않았습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


여인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믿음으로 딛고 일어났습니다. ‘탈리타 쿰’ 한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단점과 장애를 스스로 포기하고 묵인하며, 기도하지 않고 무관심 속에 지나치는 반면에 여인은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음대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눈길이 여인에게 가도록 여인을 내세우시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주님께서는 여인에게서 세상과 공동체로부터 받은 두려움을 없애주셨고, 그 여인의 믿음을 모든 이에게 본보기로 세우십니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 28,15.)


# 죽어가는 소녀, 죽은 소녀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의 믿음이 단순한 치유를 넘어 구원을 가져다주는 사건이었다면, 죽어가는 소녀가 되살아 난 사건은 자신의 믿음이 아닌 타인의 믿음과 그에 따른 기도와 간구로 구원을 받은 이야기입니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9,17)는 말씀을 하고 계셨을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마태 9,18; 마르 5,23)


그의 이름 ‘야이로’(Ἰάϊρος: ‘빛을 비추다’ 또는 ‘일으켜 주신다’, ‘구원을 베풀다’)였습니다(루카 8,41; 마르 5,22).


당시 회당장들은 그 사회에 하느님의 빛이 비치도록 안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회당장은 예배를 주관하고 회당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이들로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 엎드려 절하며, 부탁한다는 것은 큰 사건이었지요. 다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 생각했던 반면에 ‘야이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했던 것이지요.


#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예수님의 자비는 생명을 주고 인간을 다시 살리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스스로 믿는 이들뿐만 아니라 믿음을 잃지 않고 기도하며 간구하는 이들의 전구를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탈리싸 쿰’(Ταλιθὰ κούμ), ‘소녀야, 일어나라”(마르 5,42)


어느 시대, 어느 때든지, 시련의 상황, 고통과 절망의 시간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구원'을 청하는 이들 있습니다. 스스로를 돕는 일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이미 죽은 것 같은 현실이라고 생각되지만, 생명의 주인이시고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는 구원자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죽음을 마주했던 이들에게 부활은 현실이었습니다. 희망은 죽었다고 비웃는 이들에게 희망이 아직 살아있다고 믿고 선포할 수 있기를. 우리를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구세주, 임마누엘 주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심을 믿을 수 있기를.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정의는 죽지 않는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지혜 1,13-15; 2,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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