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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Jun 27. 2021

소금단지

생명을 살리시는 이


# 아브라함의 기도


아브라함의 기도는 의인 10명을 담보로 하는 벼랑 끝 작전이나 다름없었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아브라함이 주님의 눈치를 보면 넌지시 물었다. 아브라함은 사랑이신 그분의 진심을 알기 때문이다.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이때를 놓칠세라 아브라함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명 때문에 온 성읍을 파멸시키시렵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마흔다섯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파멸시키지 않겠다.”


하지만 왠지 아브라함의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소돔의 죄악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또다시 그분께 아뢰었다.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하지만 눈치를 보니 주님의 마음도 아브라함의 마음과 같은 것 같았다. 저 아래에서 의인 40명을 찾는다는 게 왠지 불안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시 쭈뼛쭈뼛 주님의 눈치를 보다 말했다.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그렇게 아브라함의 벼랑 끝 기도는 계속되었고, 마침내 아브라함은 “제가 다시 한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이라는 말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의외의 대답이었지만, 사실 이미 주님의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죄악이 소돔 성읍을 삼키고 약 1,00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삶을 망쳤어도 어떻게 해서든 저 성읍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어떻게 해서든 저들을 죄에서 돌아서게 하리라. 단 한 사람도 죽음으로 내몰지 않으리라.'


아브라함이나 주님이나 아무리 구제불능의 소돔이라도 설마 저 큰 성읍에 의인 10명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는 확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저 아래 소돔 성읍에는 조카 롯의 가족만 하더라도 롯과 그의 아내(이름이 없음)와 두 딸과 사위들까지 포함하면 6명이었으니, 설마 4명의 의인이 없을 리가 없었다. (참조 창세 19,14-15.)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아브라함 끈질기고 간절한 기도와 주님의 자비에도 불구하고 소돔 성읍에는 4명의 의인조차 없었다.


인간이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롯의 아내가 이름없는 이유와 놀부가 성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누구나 롯의 아내나 놀부가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누가 이름조차 없는 롯의 아내와 성이 없는 놀부의 허물과 죄를 탓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소돔 성읍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마음은  “죄인이라고 해도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에제 33,11) 다는 것을 우리는 알겠다.


그분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허약함과 나약함을 잘 알고 계신다. 그리고 마침내 결단을 내리신다. 당신의 아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 가시는 길-자유로운 나라


사랑과 복음의 길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길입니다(루카 9,58).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우리는 때때로 생활 조건이 개선되기를 청하기도 하고, 경제적 혹은 사회적 수준이 격상되기를 바랄 때도 있습니다. 많은 종교들이 그렇게 인간의 소원성취와 부귀영화를 약속하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그런 길이 아닙니다.


사람들과 세상은 구구절절한 이유로 하느님으로부터, 또 그 나라로부터 멀어진 세상을 꿈꾸고 있지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완성하신 나라는 소돔이나 고모라 땅처럼 ‘죽음의 정신’ 속에서 ‘죽음으로 내모는’ ‘죽음의 욕망’이 추구하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 가시는 길-생명의 나라


예수님께서 가시는 죽은 자들의 나라, 죽은 이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살아있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지금도 그렇지만, 유다인들에게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다른 어떤 의무에 앞서는 거룩한 종교적 의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초대는 종교적 의무의 중요성을 초월함을 보여줍니다.


본성에서 일렁이는 내면적이고 기복적인 바람, 인륜적 애착(인연)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를. 하느님의 나라는 죽은 자들의 나라가 아니기에.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기에.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일러 준 곳으로 백성을 이끌어라. 보아라, 내 천사가 네 앞에 서서 나아갈 것이다."(탈출 32,34.)


# 가시는 길-새로운 나라


(그러므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62)


그러므로 우리 모두 과거의 ‘나(ego)’와 ‘나’의 인연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와 인연에 매인 나를 떠나 자기의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영혼은 복됩니다. 과거에 묶인 공적에서도 보람을 찾지도 않고, 과거에 받은 상처로부터도 괴로워하거나 원망을 품지 않는 영혼은 복됩니다.


쟁기(과거)에 얽매여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십니다. 매일매일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매일매일이 새로운 날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함께 한다는 사실이 죽음 후의 일이 아님을. 언제나 매일매일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길. 그 사랑에 길에 우리의 걸음과 걸음이 놓이기를.


사람이 가야 할 길. 그 삶의 방향을 설령 잃었다 해도 다시 주님을 좇아 따를 수 있기를. 내가 만든 멍에만큼 우리의 길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도 없기에. 욕망과 허영의 유혹은 사람이 가야 할 길을 흐리게 만들 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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