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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Jun 30. 2021

소금단지

야훼 이레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יְהוָ֖ה) 이레(יֵרָאֶֽה׃)’라 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고들 한다."(창세 22,14.)


Abraham named the site Yahweh-yireh; hence people now say, "On the mountain the LORD will see."


'이레(יֵרָאֶֽה׃)' 동사는 '라아(רָאָה) 동사의 변화형인데요.


'라아' 동사는 성경에서 1299회나 쓰였던 만큼 그 뜻 매우 포괄적니다. 예컨대 '보다, 살피다,  바라보다, 조사하다'는 뜻 외에 '들음' (창세 2,19; 42,1; 탈출 20,19), '맛보다' (창세 3,6), 만지고 느끼고, 마주 보고, 마음으로 인식되고, 즐기는 것까지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야훼 이레"를 직역하면 "야훼 그분이 보실 것입니다"이지요. 사람의 속마음까지 아시는 그분은 사람처럼 자기중심적으로 보거나 오해와 추측으로 왜곡해서 보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로 보고 계십니다.


‘사랑’은 ‘해야 하는 것’(Doing)이 아니라 ‘사랑의 존재’(Being)로 기억되고 남겨지는 것이기에.


예수님과 아버지의 사랑이 그렇듯.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러했듯. 사람 사이에 ‘사랑’의 의미는 (사랑)‘해야 하는 것’을 넘어선 사랑의 ‘존재’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미 ‘사랑', 그 '존재 자체'로 기억된 사람끼리는 시련의 시간이 와도, 시험의 시간이 와도. 언제나 신뢰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아버지의 사랑


아브라함이 100세가 넘어 얻은 귀한 외아들 이사악을 하느님의 말씀대로 번제물로 바치러 아들과 함께 산을 오르는 동안 아버지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마음을 아직 헤아리지 못한 철부지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하고 부릅니다.


그가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자. 이사악이 무척 궁금한 듯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철없이 물어봅니다.


그 순간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마음이었을 텐데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기에. 하느님의 핑계를 댑니다.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이 말씀에 잠시 묵상해 봅니다. 아브라함의 순명과 하느님의 뜻을.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제 마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입니다. ‘간장종지’ 같은 제 뜻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 너희를 위한 내 사랑을 기억하라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


이 말씀에 가슴이 먹먹해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사악이 아니라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영원히 외아들 예수는 우리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오늘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외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이사악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그 마음을 헤아려 보라고. 너희를 위하여 외아들을 제물로 내어놓아야 하는 아버지의 그 마음이 지금 내(하느님) 마음이라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는 약속에 충실한 ‘사랑’(Being)이니 내 마음을 닮아 나와 맺은 약속을 기억해 달라고.


# ‘사랑’(Being), 그 존재론적인 권한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태 9,6)


유다인들에게는 사람이 병이 들었다는 것만으로, 이미 부정한 상태였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이자. 죄의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바르게 되돌려 놓으십니다. 오늘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은 그 이면에 아버지의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시고자 하는 외아들 예수님의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으로 예수님은 사랑이신 당신의 권한을 드러내셨고, 아버지의 사랑은 편협한 우리의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치유 사건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는 표징에 의미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 손가락을 보느라 달을 잊은 우리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느라 어느새 달은 잊어버리고 손가락만 기억하는 우리가 되지 않기를.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고 외아들을 내어 준 그 사랑을 잊는 것을 경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손가락 끝으로 달을 가리킬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고 ‘달’인 것처럼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은 나를 구원하실 아버지의 사랑과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임을.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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