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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Jul 01. 2021

소금단지

존재와 사랑


# 존재 사랑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얼굴이나 용모가 어느 모로 보나 남 부러울 데가 없는 이 여자에게 하나의 단점이 있었습니다. 눈썹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짙은 화장으로 눈썹을 그리고 다녔고, 눈썹이 지워질까 노심초사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에게도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습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남자가. 남자도 그 여자에게 다정스럽게 대해 주었고 둘은 결국, 많은 이들의 축하 속에서 결혼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의 눈썹 때문에 항상 불안했습니다. 일 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도 여자는 자기만의 비밀을 간직하면서 남편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세수와 화장을 하고 눈썹을 그리고 남편이 잠이 들어야 비로소 자신도 잠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행여나 들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늘 앞섰습니다. 남편이 어쩌다 눈썹이 없는 자신을 보게 되어 자기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하고, 그리고 자신에게 따뜻한 남편이 이걸로 인해 사랑이 식어질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렇게 3년이란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이들 부부에게 예상치 않던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승승장구하던 남편의 사업이 일순간 망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결국 길거리로 내몰리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연탄 배달이었습니다. 연탄을 실은 손수레를 남편은 앞에서 끌고 여자는 뒤에서 밀며 열심히 연탄 배달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봄바람이 불어오던 오후였습니다. 언덕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손수레의 검은 연탄 가루가 날아와 땀이 난 여자의 얼굴에 온통 검은 연탄 가루가 뒤덮였습니다.


여자는 눈물이 나고 견딜 수 없이 답답했지만, 도저히 닦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자기의 비밀이 탄로가 날까 싶어서였습니다.


그때, 남편이 걸음을 멈추고 아내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수건을 꺼내어 정성스럽게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아내의 눈썹 부분만은 건드리지 않고 얼굴의 다른 부분을 모두 닦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흐르는 눈물까지 다 닦아준 후 다정하게 웃으며, 남편은 다시 수레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존재를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 주고 덮어주고, 사랑을 지켜주는 것. 이해와 배려 그리고 헌신이 함께할 때, 사랑은 완성되는 것인가 봅니다.


# 세리들


세리들은 세금을 징수하는 로마 제국의 하수인이며 대리인들이었습니다. 대부분 유다인이었던 세리들이 동족에게 이런 악행을 저질렀으므로 이방인 또는 죄인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되었지요. 따라서 세리들은 유다인 사회에서 철저하게 배척당하고 추방당했습니다.


세리들은 정식 공무원이었던 세금 징수원과 달리, 예상 세입을 선불로 로마인에게 지불해야 했던 세관장에게 소속된 부하 직원들이었기에, 세리들은 무슨 조건을 붙여서라도 정해진 세금 이외에 자신들 호주머니를 채울 돈을 주민들로부터 더 걷어냈습니다(루카 3,12-13 참조).


로마 정부에 아부하고, 이방인들과 사귀고, 동족을 착취하였기에. 유다인들로부터 민족의 배신자,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법의 보호로부터도 제외됐던 세리들은 배심원이나 공증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본인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도 미움과 경멸의 대상이 됐지요.


세리들에게 제시된 회개의 조건은 매우 엄격했다. 자신들의 직업을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남들로부터 부당하게 빼앗은 몫에 5분의 1을 더해 되돌려줘야 했습니다. 이렇게 혹독한 회개의 조건 때문에 그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이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들의 우두머리인 자캐오의 집을 방문하셨고(루카 19,1-10), 세리인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셨지요(마르 2,13-17).


# 마태오


마태오(하느님의 선물)를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마태오도 당황했겠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족을 버리고 동족을 배반한 죄인 중의 죄인과 동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썩 내키거나 환대할만한 일은 아니었겠지요.


한편 세속적으로 생각해 볼 때, 세리 마태오의 입장에서도 예수님을 따름이 고민과 갈등이 없는 선택일 수는 없었습니다.


여차하면 다시 어부로 되돌아갈 수 있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세리직은 그만두면 다시 되돌아가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위(마태오)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8)


# 자비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θυσία)'이 아니라 자비(ἔλεος)다." (마태 9,13; 12,7.)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고 있는 이 상황은 세 복음서가 함께 전하고 있습니다(마태 9,9-13; 마르 2,13-17; 루카 5,27-32.).


하지만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진 마태오만 두 번씩이나 강조하며 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θυσία)'이 아니라 자비(ἔλεος)다."라는 말씀인데요.


희생 제사와 율법 규정에 발이 묶여 그 근본정신을 잊은 유다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을 마태오는 잊지 않았던 거지요.


예수님의 시선은 율법 규정에 매여 마음이 굳어 있는 사람들의 눈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눈은 하느님의 눈이시기에 자비 가득하게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그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세리와 고아와 과부, 병들고 가난한 이들에게 주님의 손길과 시선은 멈춰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지요.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마태 9,12.)


그 덕분에 죄인 취급만 받던 마태오는 주님께 부름을 받아 본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습대로 거룩한 사랑의 삶, 자비의 삶으로 방향 전환합니다. 회개의 삶입니다.


# 존재론적인 사랑으로


하느님의 존재론적 사랑은 모두를 사랑합니다.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주님을 따른 세리처럼 또 조건 없이 죄인인 세리를 형제로 받아들인 제자들처럼 형제와 이웃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존재론적인 사랑은 성(聖)과 속(俗), 초자연과 자연, 교회와 세상, 영(靈)과 육(肉)을 차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로 인해 혹은 그로 인해 ‘과연 무엇을 잃을 것이고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계산하거나 자기만의 잣대로 재지도 않습니다.


존재론적인 사랑은 상대의 신분이나 상대의 처지를 보지 않습니다. 그가 죄인인지 의인인지 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족하고 죄인이며, 상처 받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더 밝은 빛으로 존재합니다.


존재론적인 사랑은 존재함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도 지치지도 않는 사랑이지만, 그렇다고 당신을 강요하거나 주장하지 않고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존재론적인 사랑은 변함이 없기에 형제가 변하기를 혹은 변화되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누룩이 아니기에 다만 스스로 가르침을 행할 뿐, 그 무엇도 바라지 않습니다.


존재론적인 사랑은 스스로 그 무엇이 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 무엇을 청하지도 않고 다만 따를 뿐입니다. 물처럼. 빛처럼. 소금처럼. 그에게서 그가 됩니다. 성체의 신비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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