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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Jun 29. 2021

소금단지

꼬리를 삼키는 자


# 우로보로스 같은 사람들


신화에도 등장하는 자신의 꼬리를 물고 삼키는 뱀의 형상을 '우로보로스'(그리스어: ουροβóρος)라고 하는데요. "꼬리를 삼키는 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실제로 뱀은 심한 스트레스나 배가 고플 때, 자신의 꼬리를 삼킨답니다.


칼 융과 같은 심리학자들은 '우로보로스'를 인간의 심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여겨기도 했는데요.


살다 보면 더러운 '영'들의 꼬임을 당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지요. 그들은 우로보로스처럼 자신의 꼬리를 삼킬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큰 해를 끼칩니다.


# 다시 한번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중국 부패 공직자 라이샤오민 3천억 뇌물을 고스란히 두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건이 있었지요.


그의 이름과 함께 인터넷 검색 순위에 다시 오른 중국의 조직폭력배 두목이자 재산 7조 원대 광산 재벌인 한룽그룹 류한 회장의 기사도 있습니다.


류한 회장은 사형집행 직전 이태백보다 더 슬프고 여린 ‘시 같은 말’을 남겼는데요. 유언이 돼버린 그의 시어는 많은 것들을 되새기게 합니다.


“다시 한번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노점이나 작은 가게를 차리고 가족을 돌보면서 살고 싶다. 내 야망, 인생, 모든 게 잠깐인 것을, 그리 모질게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바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물처럼 그냥 흐르며 살아도 되는 것을, 악 쓰고 소리 지르며 악착같이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을 그렇게 못살았다. 말 한마디 참고, 물 한 모금 먼저 건네주며, 잘난 것만 재지 말고, 못난 것도 보듬으면서 살았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을 이제야 알았다. 세월의 흐름이 모든 게 잠깐인 것을, 흐르는 물은 늘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왜 나만 모르고 살았을꼬? 무엇을 얼마나 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동안 아등바등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오피니언, 2019. 8. 16.-


# 두 세계 그러나 하나인 나라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한 복판(성과 속이 어우러진)에 계십니다. 더욱이 그분은 병들고 가난하며,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을 찾아가십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를 중심으로 서편(유다인들의 지역)과 동편(이방인들의 지역)을 왔다 갔다 하십니다. 오전에는 성전에서 오후에는 성전 밖에서(마르 1장; 마태 8장; 루카 4장)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십니다. 하루 종일 ‘두 세계' 그러나 '하나인 나라’를 왕래하십니다.


# 돼지가 어때서?


마카베오의 순교자들은 돼지(חֲזִיר, 하지르, 멧돼지 포함) 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당했지요.(2 마카 6, 18-31) 또 돼지를 제물로 바치는 것을 성전에 대한 신성 모독 중 하나로 여겼는데요(1 마카 1, 47).


그 이유를 살펴볼까요.


1. 새김질하지 않는 돼지: "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짐승의 고기를 먹어서도 안 되고, 그 주검에 몸이 닿아서도 안 된다. 그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참조: 레위기 11,7; 신명기 14,8; 이사 66,17)


2. 부패하기 쉬운 돼지고기: 특히 중동처럼 덥고 건조한 지역의 경우 돼지고기가 부패하기 쉽고 이것을 잘못 먹으면 식중독에 걸릴 확률이 높았습니다.


3. 유목민에게는 불결한 이방인을 상징: 본래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돼지가 없었다지요. 정착하여 생활하는 이방인들과 달리 이곳저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유목민 생활에서 돼지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4. 돼지의 지저분한 습성과 먹는 음식물이 매우 불결하다: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2 베드 2,22) 유대인들은 회개하고 다시 죄를 반복하여 죄짓는 사람도 돼지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는군요.


5. 돼지는 먹기를 탐하고 잠자기를 좋아한다: 돼지는 게으르며 욕심이 많은 사람을 대표했습니다. 소나 양, 염소처럼 젖을 내어주거나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살찌워 도살하는 사육용 동물이었으며, 소나 양처럼 나뭇잎, 풀을 먹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먹는 곡식(옥수수, 감자, 콩)을 주식으로 먹었습니다. 특히 야생 돼지는 농작물을 망쳐놓는 대표적인 '더러운 파괴자'(시편 80,13)의 상징이었습니다.


6. 돼지는 머리를 숙이고 코로서 땅을 후벼 파며 먹이를 찾는다: 돼지의 이런 습성은 신령한 하늘의 세계를 보지 않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육에 속하여 땅에 것,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찾는 속된 사람을 비유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새김질하지 않는 돼지는 개와 함께 이방인들을 상징하는 경멸적 용어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 6)


# 선한 영을 쫓아낸 자들이 사는 곳


오늘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 이방인의 ‘게라사인들의 지방’(마르 5,1; 루카 8,26)으로 가십니다. 이곳을 마르코와 루카는 ‘게라사’로 전하고 있지만, 마태오는 ‘가다라인들의 지방’로 전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학자마다 다른 지역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중요한 점은 이곳이 예수님을 ‘거부한 곳’,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쫓아낸 곳’(게르게사: 쫓아낸 자들이 사는 곳)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참조: 마태 8,34; 마르 5,17; 루카 8,37)


이곳은 유다인들에게 불결한 곳, 더러운 영들이 출몰하는 무덤들이 있는 곳(5,2-5), 부정한 짐승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돈(?)이 되는 돼지들을 방목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상징적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를 예언하고 있는데요.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쫓고 있는 이방인들(군대)로부터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 선한 영을 거부하는 삶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5,7)


오늘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괴롭히지 말아 달라’며(5,7) 관계 맺기를 거부합니다.


그는 무덤에 살고 있었습니다. 죽은 자들처럼 하느님과 이웃들로부터 폐쇄되고 단절된 죽음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살아있지만, 생명이 없는 삶을 선택하고 있었습니다.


무덤에 살고 있는 왜곡 되어 분열된 자아는 집착과 탐욕으로 이웃과 하느님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비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5,8)하고 말씀하십니다.


‘더러운 영’은 순수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영이 오염되고 결핍되었음을 뜻하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시선으로 볼 때, 우리의 영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오염되었고 모두가 다 치우쳐있고, 모두 현혹되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알면서도 스스로 죽음 땅과 무덤을 선택한 삶을 찾아갈 때가 있으니 말이지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우리 모두가 지금-이순간. ‘절대 사랑’이신 그분 앞에서 올바른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건강하고 ‘제정신’을 갖춘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분별하지 않으시고 가르지 않으시는 ‘절대 사랑’, ‘거룩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건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으로 ‘거룩함’과 ‘더러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우리가 누구를 더럽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과연 누가 자신의 꼬리를 물고 삼키는 뱀의 형상인 '우로보로스'와 무관하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는 오늘도 감사히 다시 하늘을 우러러봅니다.


“형제 여러분,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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