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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Jul 09. 2021

소금단지

두 가지 두려움



# 두 가지 두려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그 흔들림이 우상과 탐욕에 의한 흔들림인지 아니면 진실 앞에 마주 섰을 때, 영적 경외심에 시작 흔들림인지는 식별해야 할 문제인데요.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에는 크게 두 가지로 함축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성스러운 신비 앞에 섰을 때, 느끼게 되는 종교적이고 영적인 두려움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또 다른 두려움은 육적이고 지극히 인간적인 두려움이겠지요.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욕구에 뿌리를 둔 두려움이 자기 자신을 속박하고 성장하지 못하게 한다면, 초자연적이고 근원적이며 종교적인 두려움은 인격을 성숙하게 하고 성장시키는 디딤돌이 되지요.


적이고 경험적인 두려움은 인간을 상대적으로 위축시키고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두려움이지만, 선험적이고 초월적인 두려움은 오히려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두려움입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 28.30-31.)


오늘 예수님께서는 선험적이고 근원적인 두려움, 즉 성스러운 신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 성스러운 신비


인간이 '성스러운 신비' 앞에 서게 되면 ‘황홀감’과 ‘두려움’이라는 두 가지 원초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고 하지요.


'전혀 다른 존재'와 마주했을 때, 압도되고, 황홀하며 매혹적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신비로운 체험을 신학자 루돌프 오토는 ‘성스러움’의 감정에 주목하며 “누멘적인 것(das Numinose)”이라 말합니다.


하느님의 현현을 목격한 이사야가 그 황홀경에 빠지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입술이 더러운 사람”으로 여기며 두려워하는 모습은 신비로운 체험을 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겠지요. 이런 누멘적 체험에서 인간은 종교적 두려움, 즉 경외심을 느끼게 되는데요.


바로 이 원초적인 경외심이 신앙의 길을 찾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고 후험적으로 갖게 되는 모든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지혜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다."(잠언 9,10.)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다."(지혜 1,14)


"주님을 경외함은 지혜의 근원이다."(시편 111,10.)


#  두려운 단독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박해와 배척에 대한 처신을 가르쳐주셨고, 오늘 다시 격려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그만큼 제자들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시면서 말이지요.


세상에 파견된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마태 10,26)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언제나 함께 계시는 하느님은 감추어진 신비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하느님의 사랑은 박해 속에서도 온 세상에서 꽃 피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순교자들의 믿음으로 피워진 사랑의 교회가 이 말씀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기”때문입니다. 인간이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영혼과 육신의 생사를 쥐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내 안에 숨어계시고 나와 함께 계시는 보이지 않는 생명의 하느님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그 가장 작은 생명도 하느님의 섭리 안에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두고 볼 때, 하루살이와 같은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과 역사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인류와 함께 계셨고 우리의 죄까지도 선으로 이끄시는 분이셨습니다.


경외심에 찬 두려운 고백은 강한 믿음의 씨앗입니다. 작은 씨앗이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 하느님의 섭리와 보살피심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할수록 세상이 주는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1요한 4,18.)


때때로 우리가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여겨지고, 하이데거의 말처럼 ‘던져진 존재’라고 느껴질 때조차 하느님께서 섭리하시고 다스리심을 신앙의 선조들은 믿음으로 고백했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을 만큼 자녀들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박해에서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집회 25,12; 마태 10,26.)


“너 이스라엘, 나의 종아 내가 선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너는 나의 종 내가 너를 선택하였고 너를 내치지 않았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 (이사 4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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