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ven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

by 진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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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나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다시 우물가에 있었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천벌 받은 ‘두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과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의 이야기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나의 이야기다.


상황을 상기하자면 예수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을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께 엎드려 절하며,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한다.

그의 이름은 ‘야이로’(Ἰάϊρος) ‘빛을 비추다’ 또는 ‘일으켜 주신다’, ‘구원을 베풀다’는 뜻이 담긴 이름인데, 당시 회당장들은 그 사회에 하느님의 빛으로 안내하는 사람들이자 백성의 지도자에 속했다. 회당장은 예배를 주관하고 회당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이들로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가 예수를 찾아와 엎드려 절하며 부탁한다는 것은 대단한 스캔들이다. 거만하고 교만했던 대부분의 지도자들과 달리 ‘야이로’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했던 것이다.

# 죽어가는 여자

그리하여 예수의 일행과 함께 회당장의 집으로 향해가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그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의 뒤로 가서 그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그 믿음대로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수는 곧 자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었다. 그녀는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음을 알고 떨며 나와서 예수 앞에 엎드려, 자기가 무슨 까닭으로 당신께 손을 대었으며, 또 어떻게 즉시 병이 나았는지 온 백성 앞에서 아뢰었다. 그러자 예수가 그녀에게 말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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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죽은 딸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예수가 아직 말하고 있을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회당장은 예수께 이렇게 말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자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고 있었다. 그러자 예수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던 이들이 예수를 비웃었다. 예수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했다.

“탈리타 쿰!”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아이의 영이 되돌아와서 아이가 즉시 일어섰다. 예수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지시하셨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

탈리타 쿰’(Ταλιθὰ κού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탈리타 쿰!”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가산을 탕진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여인과 이미 숨을 거둔 딸. 이 이야기는 다른 누구의 과거도 아니고 아주 오래된 옛이야기도 아니며, 신화도 아닙니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믿음으로 딛고 일어난 이들. 죽음과 불행으로부터 ‘탈리타 쿰’ 한 이들의 실화입니다. 지금 바로 나의 이야기이며, 오늘날 내 이웃의 이야기입니다. 생명이시고 사랑이신 그분은 오늘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말씀하십니다. 죽어가는 이들과 이미 죽은 이들. 그들에게 명령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탈리타 쿰!”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단점과 장애를 스스로 포기하기도 하고 묵인하기도 하며, 스스로를 방관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많은 이들이 자신과 이웃의 죽음을 무관심 속에 지나치는 반면에 죽어가던 여인과 야이로는 자신의 처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음대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눈길이 믿음의 여인에게 가도록 여인을 내세우시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주님께서는 여인에게서 세상과 공동체로부터 받은 두려움을 없애주셨고, 그 여인의 믿음을 모든 이에게 본보기로 세우십니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 28,15)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의 믿음이 단순한 치유를 넘어 구원을 가져다주는 사건이었다면, 이미 죽은 소녀가 되살아 난 사건은 자신의 믿음이 아닌 타인의 믿음과 그에 따른 기도와 간구로 구원을 받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자비는 생명을 주고 인간을 다시 살리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스스로 믿는 이들뿐만 아니라 믿음을 잃지 않고 기도하며 간구하는 이들의 전구를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탈리타 쿰’(Ταλιθὰ κούμ),

‘소녀야, 일어나라”(마르 5,42)


# 황금률

어느 시대, 어느 때든지, 시련의 상황, 고통과 절망의 시간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구원'을 청하는 이들 있습니다. 스스로를 돕고 이웃을 돕는 일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하늘은 또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을 돕습니다. 이미 죽은 것 같은 현실이라고 생각되지만, 생명의 주인이시고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는 구원자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죽음을 마주했던 이들에게 부활은 현실이었습니다. 희망은 죽었다고 비웃는 이들에게 희망이 아직 살아있다고 믿고 선포할 수 있기를. 우리를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구세주, 임마누엘 주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심을 믿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그림자 뛰어넘기

어머어마하게 큰 코끼리.

그가 사람을 말을 듣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한데요. 이렇게 덩치가 크고 다루기 힘들 것 같은 야생 코끼리를 길들이는 방법. 그 시작은 아주 어릴 때부터 발에 족쇄를 채우는 것부터라고 합니다.

우리의 영혼의 크기와 능력을 거인에 비유하는 이들도 있는데요. 내 안에 있는 거인은 어떻습니까? 안녕하신가요? 자유롭나요? 사랑받고 있나요? 혹여 족쇄를 채워두신 것은 아닌지요?

코끼리 길들이기와 마찬가지로 금붕어 이론이라는 게 있다고 합니다.

금붕어가 사는 어항. 그 한 중간에 유리벽을 만들어 어항을 반으로 나누어 놓으면, 익숙지 않은 금붕어들이 머리를 부딪치며 살다가 결국은 주어진 반쪽에서만 생활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어항 속 유리벽을 없애도 금붕어들은 건너편으로 헤엄쳐 나가지 않는다고 하지요. 주어진 절반. 이미 익숙한 절반의 공간에서만 지낸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런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상황이 곧 발생하겠지요? 크게 두 가지 경우일 것입니다. 이 어항에 갓 들어온 새로운 금붕어의 등장. 그리고 그동안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의 틀을 깨버리는 금붕어가 존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절반의 공간에서만 움직이던 어항에도 새로운 차원의 세계. 신세계가 펼쳐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예수님의 신학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신학(하느님 이야기)은 초월 신학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이야기가 초월적입니다.

한 존재가 자기의 한계. 자기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사랑받고 있고 지금보다 더 큰 소명. 더 큰 많은 달란트를 받았음을 확인받았을 때, 그는 초월하게 되는데요. 특히 성령으로부터의 확신은 이전의 자기를 뛰어넘는 힘이 되고 실제로 자신을 초월의 존재로 인식하지요. 과거의 패러다임과 틀, 어항 속의 벽을 자유로게 넘나드는 초자아 말입니다.

자기만의 패러다임을 뛰어넘은 사람. 그는 이제 더 이상 자기 안에 갇힌 존재가 아닙니다. 하느님과 그 사랑 안에서 자유로운 존재. 초월 신학적 존재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는 이제 자기만의 동굴에서 벗어나 타자에게로 자기를 내어놓게 되겠지요. 그의 사랑도 자기를 넘어 타자로 향하게 되겠지요.

# 4조 8천억?

내게 주신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의 가치를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축복은 분명 우리에게 다그칩니다. 탈리타 쿰’(Ταλιθὰ κούμ). 과거의 자기를 뛰어넘으라고.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을 화폐가치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만일 화폐로 환산한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그 믿음대로 받으셨습니다. 아멘.

우리의 영혼은 얼마나 성장했나요?

아직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그림자.

고정관념과 편견에 갇혀 있나요?


여전히 나뿐만 아니라 내 형제와 이웃까지도 그림자 동굴 속에 가두어 두신 것은 아닌지요? 누군가를 가두는 그림자, 편견과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영혼은 이미 하느님을 뵌 것입니다. 이미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으신 것이지요.


1만 달란트를 빚진 종의 예를 들면. 하느님 나라를 물려받은 자녀들은 최소 4조 8천억 원 정도씩은 하느님께 빚이 있는 것이지요. 아니 빚이 아니지요? 이미 탕감을 받았으니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따져볼 때, 1만 달란트 약 4조 8천억 원 ~ 9조 원은 이제 우리 몫입니다.


자녀들에게 조건 없이 나누어주신 유산입니다. 상속세 없이. 1만 달란트로 자녀들은 앞으로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분의 사랑을 올바로 알게 되고 새로운 눈으로 그분의 나라와 세상을 바라봤을 때, 4조 5천억은 가장 적게 받은 이의 몫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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