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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ieve
한 백인대장이 황급히 다가와 도움을 청합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예수가 말합니다.
그러자 백인 대장이 대답하였지요.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가 감탄하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돌아보며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그리고 다시 예수는 백인대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드라마틱한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입니다. 짧지만 강렬하고 순수하며 충성스러운 신앙 고백입니다. 교회는 그의 말을 전례 속으로 받아들여 기억하고 같은 고백을 바칩니다.
로마 법에 의하면 ‘노예’나 ‘종’은 살아있는 재산으로 도구나 다름없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에 대한 결정권이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주인은 종을 학대할 수 있었고 종의 생명은 주인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일을 할 수 없는 종은 밖에 내어버려 죽게 하기도 했습니다.
'백인대장'과 '종'의 상반된 신분을 고려해 볼 때, 백인대장이 자기 종을 대하는 태도는 예수님의 마음에 들었고 그 신앙은 칭찬받을 만큼 깊었습니다. 자기 종을 위해서 어떠한 어려움도 감내하려는 태도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드신 예수님의 마음과도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 한 말씀만 하소서
백인대장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노예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지만, 그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과 마주한 것이지요.
지휘관이자 통치권자로서 그가 지닌 지위와 권력은 물론 돈과 재물로도 병들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자신의 무능과 무력을 깨달은 것입니다. 단독자 앞에 선 인간의 실존이자 현주소입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과 종을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그의 사랑과 믿음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분 마음에 드는 기도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음을 다시 되새기게 되는데요. 백인대장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을 향한 신뢰의 깊이도 사랑의 깊이에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 믿음의 그릇
한 군종 신부님이 최전방에서 짬짬이 벌통을 쳐서 꿀을 땄습니다. 아주 좋은 꿀을 따서 부대에 있는 모든 병사들에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빈 그릇을 가지고 와서 꿀을 타가세요.”
그랬더니 어떤 병사는 빈손으로, 어떤 병사는 박카스 병을 가지고 왔습니다. 또 다른 병사는 수통을, 그러나 성당에 다니는 병사들은 대부분 그릇을 가지고 왔습니다. 가져온 그릇도 그 크기가 제각각이었지만, 신부님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꿀을 가득 담아 주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그릇의 크기만큼 꿀을 담아주었습니다.
얼마 후, 불평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빈손으로 온 병사나 박카스 병을 들고 온 병사, 그리고 신부님의 말을 믿지 않고 꿀을 받으러 오지 않은 병사들의 불만 섞인 목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신부님에게 항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마다 가져온 그릇의 크기는 신부님에 대한 ‘신뢰’의 크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지요.
# 그릇의 크기
저마다 외모가 다르듯, ‘마음 그릇’의 크기도 다른 것 같습니다. ‘사랑 그릇’의 크기도 그렇겠지요. 어떤 이는 백 명을 사랑할 수 있는 넉넉함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단 한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고 내치는 이들도 우리와 함께 살아갑니다.
내 안에 있는 ‘믿음의 그릇’, ‘사랑의 그릇’은 그 크기와 깊이가 얼마나 될까. 또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그분을 신뢰하는 신뢰심의 깊이는 얼마나 깊을까 궁금해집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1티모 2,1)
# 믿음의 시작
한 청년이 사막의 유명한 스승에게 깨달음을 얻고자 찾아왔습니다.
"낙타는 어디에다 매 놓았나?" 스승이 물었습니다.
"하느님이 지켜주신다는 믿음으로 매어 놓지 않았습니다." 청년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할 수 일까지 대신해주시는 분이 아니시네. 빨리 나가서 낙타를 기둥에 매어 두게. 깨달음을 얻는 것보다 낙타를 매어두는 것이 우선이네."
# 다양한 믿음
믿음은 그 성숙도와 깊이에 따라 유아기적인 믿음에서부터 성장한 어른의 믿음까지 여러 단계로 드러납니다. 또 순수한 믿음이 있는가 하면 색안경을 낀 믿음도 있고요.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에도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각양각색의 믿음들이 살아가고 있지요.
믿음의 내용도 중요합니다. 바람에 쉽게 날리는 풍선처럼 속이 비고 겉 꾸미기에 그치는 믿음도 있고,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믿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바람 속에서도 변함없이 우뚝 선 바위와 같은 믿음도 있지요.
병 속에 꽃이 담겨 있으면 꽃 병입니다. 그러나 같은 병 속에 술이 담기면 술병이 되지요. 한 사람의 마음속에 담긴 믿음이 어떤 믿음이고 얼마만큼 성장하고 성숙한 믿음인가에 따라 하느님과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의 태도가 다르기에 믿음은 한 사람의 운명과 인생이 바꿔놓기도 합니다.
# 카페인 실험
미국의 <하버드대 심리학과>에서 '커피와 수면'에 대한 흥미로운 실험을 합니다.
어느 날 오후, 기숙사 학생 2백 명을 무작위로 뽑아, A그룹 100명과 B그룹 100명으로 나누었습니다.
A그룹에게 커피 3잔을 주고, B그룹에게는 우유 3잔을 주고 잠들게 한 후,
다음날 잠을 잘 잤는지 물어보았습니다.
A그룹의 65%가 엎치락뒤치락거리며 잠을 잘 못 잤고 17%가 날밤을 새웠으며, 18%만이 간신히 잠을 잤다고 답했습니다. 반면에 B그룹은 거의가 잠을 잘 잤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하버드에서 이런 단순한 실험을 하지는 않았겠지요? 변수는 카페인이었는데요. 우유에는 카페인을 넣었고 커피에서는 카페인을 뺏습니다.
그런데 왜?
카페인이 없는 커피를 마신 A그룹은 잠을 잘 못 자고 카페인이 든 우유를 마신 B그룹은 잠을 잘 잤을까요?
# 한 사형수
1930년 인도의 어느 교도소. 한 사형수가 집행관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이제 곧 사형이 집행됩니다. 당신의 피를 조금씩 빼내는 방법으로 사형을 집행하겠습니다."
집행관은 그를 의자에 앉힌 채, 눈을 가리고 손과 발을 묶은 뒤 칼로 손과 발에 상처를 내어서 피가 물통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실제로는 손과 발에 따끔한 자극만 주었고, 떨어지는 핏방울 소리도 미리 준비된 '물'이었습니다.
사형수는 점점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괴로워하였고 이내 온몸에 힘이 빠지는 듯 보였습니다. 집행관은 사형수를 위해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하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노랫소리를 점점 작게 불렀습니다.
준비된 물이 방울방울 통 안으로 다 떨어지자 집행관은 노래를 멈추었습니다. 사형장에는 완벽한 정적만이 흘렀습니다. 곧 집행관과 의사가 사형수의 생사를 살폈습니다. 의사의 의학적 판단은 사망이었습니다.
# 어떤 선원
1950년대 스코틀랜드의 한 항구에서 와인 상자를 하역한 후,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되돌아가는 포도주 운반선의 냉동창고에서 한 선원이 얼어 죽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선원이 안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동료가 냉동창고의 문을 잠가버렸습니다. 자신이 냉동창고에 갇혔다는 것을 알게 된 그 선원은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냉동창고 안에는 충분한 음식이 있었지만, 선원은 자신이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냉기가 코와 손가락 발가락을 얼렸고 시간이 가면서 언 부위는 넓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내 따끔거리는 상처로 바뀌어 갔습니다. 선원은 고통과 죽어가는 과정을 시간대별로 생생하게 냉동창고 벽에 기록하였습니다.
"몸이 점점 얼어붙는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윽고 온몸이 하나의 얼음덩이로 굳어져 가는 것을 느꼈고 움직임이 사라졌습니다.
배가 리스본에 도착한 후, 선장과 동료들은 냉동창고 안에 죽어있는 선원과 그가 벽에 쓴 고통과 죽음의 기록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선장은 놀라 기절할 뻔했습니다. 그 이유는 기록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컨테이너 속의 온도가 상당히 높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장은 실내온도를 다시 측정했습니다. 그 결과 영상 19도였습니다. 리스본으로 돌아오는 배는 포도주를 적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발 전에 냉동창고의 전원을 꺼놓았습니다. 심지어 냉동창고의 공간이 넓었기 때문에 공기도 충분했었습니다. 하지만 죽은 선원의 모습은 그 누가 보더라도 극심한 추위에 얼어 죽은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부검 결과 혈액이 응고된 흔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선원은 얼어 죽었을까요?
# 무엇을 믿을까?
한편으로는 무섭기까지 한 이야기들입니다. 믿음만으로 생리작용까지 변하고 심지어는 숨이 멈추며 죽음까지 불러온다는 사실에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라는 자문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어떻게’ 믿으며 살아가십니까?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이룩한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주위를 돌아보면 하느님의 보살핌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없음을. 흔들리는 나뭇잎에도 하느님의 손길이 머물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도 굶주리지 않고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형제들과 피조물들과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 그리고 바다와 산들을 거닐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자녀들이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길은 감사하며,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것이 아닐까. 부모님의 마음이 그렇듯, 자녀들이 부모의 은혜를 잊지 않고 행복해하고 감사드리는 것, 그것만으로도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은 흡족해하실 것입니다. 아멘.
1만 달라트의 빚을 탕감해주신 하느님. 아니 4조 5천억 원을 “나는 모른다”라고 하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피조물도 하느님의 축복과 사랑을 찬미하고 감사하는데, 여전히 투정과 불만으로 가득한 가시덤불과 돌밭 같은 우리의 믿음을 다시 반성하고 성찰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