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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오
난공불락(難攻不落)의 도시 예리코.
바다면 보다 250m나 낮은 예리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역이면서도 가장 오래된 도시. 기원전 8,000년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예수가 사탄의 유혹을 받은 '유혹의 산‘이 있고, ‘엘리사(Elisae)의 샘’이라 불리는 오아시스를 품고 있는 사막이자 '종려나무 성'이라 불리는 곳이다.
BC 14세기경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면서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했던 지역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축복이 시작된 땅이다.
이곳을 예수의 일행이 지나가고 있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세관장이란 직업은 민족에게 손가락질받는 직업이다. 동족에게 세금을 받아 로마제국에 바치기도 했지만 종종 자기 배를 채웠다.
가장 멸시당하던 존재. 세리, 키 작은 자캐오. 부자였지만 공동체에서 지워진 이름. 그의 돈은 더러운 돈이라며 아무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소유한 것이 아무리 많아도 그는 이방인 노예와 다름없었다. 그 누구의 증인도 될 수 없었으며, 진술할 수도 없는 철저하게 지워진 존재이다.
키 작은 자캐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오르고 또 올랐다. 그의 작은 키처럼 지식. 권력. 명예. 부. 등등 극복해야 하고 이겨내야 하며, 디디고 일어서야 할 장애도 참 많았다. 그리고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콤플렉스를 극복한 듯 보였다.
성공신화는 장애를 딛고 일어 선 이들의 신화이기에. 그도 정상을 향해 오르고 또 올라 세관장이 되고 부자도 되었다. '시시포스의 돌'처럼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 다시 오르고 또 올랐기에 가능했다.
구원이 거기에 있고 행복이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에. 하지만 행복은 거기에 없었다. 구원자도 없었다. 이제 그는 그의 이름을 불러줄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지만 투명인간이 되었다. 너무나 외로웠다. 삶이 사막 같았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나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스탕 블루, 사막)
사람들에게 잊힌 존재 키 작은 자캐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투명인간.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늘 무거운 짐덩이처럼 달고 살아야 하는 자캐오.
내 이름을 불러주는 그 존재가 메시아라면 소원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과 함께 다닌다니 '나도 한번 만나볼 수만 있다면... 그가 내 이름을 불러줄 수만 있다면… 나비처럼 훨훨 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태어난 것처럼.
자캐오는 예수가 어떠한 분인지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렇게라도 그곳을 지나가는 예수를 보려고.
'지나가는 길에 그가 나를 볼 수 있을까? 키도 작고 직업도 천한 나를 만나줄까? 그를 만나도 선뜻 앞에 나서기도 두렵다.' 그래서 돌무화과나무 위에서라도 그를 보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의 마음을 알았을까? 아님 우연이었을까? 예수가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며 그에게 말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이 말을 들은 자케오는 얼마나 기뻤을까? 샤르트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타인은 나에게 있어서 나의 존재를 훔쳐가는 사람인 동시에, 나의 존재라고 하는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냥 그의 얼굴만 보아도 숨통이 트일 것만 같았는데, 메시아가 내 집에 묵겠다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의 일행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투덜거리며 수군댔다.
“흥!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죄인은 사람도 아니었다. 같은 동족들에게 세금 걷어서 로마에 바치는 세리는 매국노인 동시에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화폐를 만지기 때문에 우상숭배에 빠진 죄인이다. 그런 죄인의 집에 들어가다니. 그러든지 말든지 그들의 수군거림은 자캐오의 설렘과 기쁨을 막을 수 없었다. 자캐오는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를 환대하며 말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가 그에게 이렇게 응대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창조주께서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십니다.
세리들은 정식 공무원이었던 세금 징수원과 달리, 예상 세입을 선불로 로마인에게 지불해야 했던 세관장에게 소속된 부하 직원들이었기에, 세리들은 무슨 조건을 붙여서라도 정해진 세금 이외에 자신들 호주머니를 채울 돈을 주민들로부터 더 걷어냈습니다.(루카 3,12-13 참조)
로마 정부에 아부하고, 이방인들과 사귀고, 동족을 착취하였기에. 유다인들로부터 민족의 배신자,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법의 보호로부터도 제외됐던 세리들은 배심원이나 공증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본인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도 미움과 경멸의 대상이 됐지요.
세리들에게 제시된 회개의 조건은 매우 엄격했습니다. 자신들의 직업을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남들로부터 부당하게 빼앗은 몫에 5분의 1을 더해 되돌려줘야 했습니다. 이렇게 혹독한 회개의 조건 때문에 그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이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들의 우두머리인 자캐오의 집을 방문하셨고, 세리인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셨지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잣대와 기준으로 내가 아닌 상대를 절대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로남불'이라고 하던가요. 율법을 잘 알고 해석을 할 수 있었던 상류층이나 부유한 고위층인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세관장들일수록 율법을 잘 모르고 지킬 수 없는 이들을 상대로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어놓고 그들과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예수님께서 만나셨던 사람들과 예수님께서 함께 동행했던 이들은 힘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세리 마태오(하느님의 선물)를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마태오도 당황했겠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족을 버리고 동족을 배반한 죄인 중의 죄인과 동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썩 내키거나 환대할 만한 일은 아니었겠지요.
세속적으로 생각해 볼 때, 세리 마태오의 입장에서도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고민과 갈등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차하면 다시 어부로 되돌아갈 수 있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세리직은 그만두면 다시 되돌아가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위(마태오)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8)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12제자 가운데 하나로 뽑아 세우셨습니다.
# 존재론적인 사랑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며,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존재론적 사랑은 이 모두를 사랑하시리라 믿습니다.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주님을 따른 세리처럼 또 조건 없이 죄인인 세리를 형제로 받아들인 제자들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이라 믿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그 존재론적인 사랑은 사람들처럼 성(聖)과 속(俗), 초자연과 자연, 교회와 세상, 영(靈)과 육(肉)을 차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로 인해 혹은 그로 인해 ‘과연 무엇을 잃을 것이고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계산하거나 자기만의 잣대로 재지도 않으십니다. 존재론적인 사랑은 상대의 신분이나 상대의 처지를 보지 않습니다. 그가 죄인이든 의인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족하고 죄인이며, 상처 받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더 밝은 빛으로 존재합니다.
존재론적인 사랑은 존재함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도 지치지도 않는 사랑이지만, 그렇다고 당신을 강요하거나 주장하지 않고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존재론적인 사랑은 변함이 없기에 형제가 변하기를 혹은 변화되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누룩이 아니기에 다만 스스로 가르침을 행할 뿐, 그 무엇도 바라지 않습니다.
존재론적인 사랑은 스스로 그 무엇이 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 무엇을 청하지도 않고 다만 따를 뿐입니다. 물처럼. 빛처럼. 소금처럼. 그에게로 가서 그가 됩니다. 성체의 신비가 그렇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사랑은 그분 자신처럼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무한대로 나누어지고 쪼개지며 더 큰 사랑으로 퍼져나갑니다. 사랑은 또 다른 사랑, 더 큰 사랑을 낳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거든.”(어린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