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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Jul 14. 2021

소금단지

시시포스의 비극


# 시시포스의 비극


욕심 많은 시시포스(Σίσυφος)는 꾀도 많았고 속이기를 좋아했지요. 도가 지나쳐서 신들뿐만 여행자들과 방랑자들을 기만하고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되는데요.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큰 돌을 가파른 언덕 위로 굴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돌을 정상에 올리면 돌은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져 처음부터 다시 돌을 밀어 올리는 일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혹자는 시시포스의 비극에 대해 이렇게 말하지요.


"시시포스의 비극은 산 정상에 굴러 떨어진 돌을 처음부터 다시 혼신의 힘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돌이 다시 굴러 떨어지리라는 것을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이 비극이다."


# 무거운 짐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무거운 짐’은 무엇일까요? 시시포스의 돌처럼, 매일매일 반복되어야 하는 무거운 삶의 무게일까요? 아니면 흔히 우리가 말하는 운명을 비유하신 걸까요? 아니면 신의 벌일까요?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시지요. 오늘도 그분의 마음은 우리의 짐을 덜어주시고자 애쓰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말씀하시는 '무거운 짐'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분의 말씀을 알기 위해서는 다음의 말씀을 같이 묵상해야 해야 하는데요.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카 11,46.)


당시 상황은 이러했습니다.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지요.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러자 이를 눈치채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 11, 37-43.)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기 어려운 짐'은 율법에 덧붙여진 세부규칙들을 말합니다.


자기도 지기 힘들고 어려운 짐을 타인에게 지게 하고는 뒷짐 지고 있는 행태를 점잖은 말로 갑질이라고 하지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갑질 중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지키려 하기보다는 형식적인 규칙들을 덧붙이기를 좋아했는데요. 예를 들면, 안식일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지, 어느 정도의 무게를 들 수 있는지 등등의 규정을 첨가했습니다.


또 '아이를 드는 것은 괜찮고 돌을 드는 것은 안되는데. 돌을 든 아이를 드는 것은 어떤가?'라는 것을 두고 논의도 했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 결과, 율법은 하느님의 마음을 알려주고 실천하는 도구가 되기보다는 지키기 어렵고 복잡한 규정들을 엮은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보통 사람들을 ‘율법을 어기는 자’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


사랑이신 하느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당신 자녀들의 어깨 위에 얹혀 짐을 당신의 짐과 바꾸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정녕 그분의 멍에는 편하고 그분의 짐은 가벼운 이유"입니다.


# 인간의 비극


시시포스의 비극. 그 화두를 푸는 열쇠는 욕망하는 인간, 그 자신에게 있는 것 아닐까요? 인간의 욕망, 그 시시포스와 같은 간사한 유혹자는 창세기 때 그날처럼 오늘도 속삭입니다.


"욕심부려라! 먹음직스럽지 않으냐? 저 짐을 정상으로 밀어 올려라! 뭔가 지혜로워질 것 같지 않느냐? 신들의 지혜는 저 정상 위에 있단다."


인간의 비극. 스스로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거운 죄를 지으려 하는데서 비극은 시작됩니다.


# 멍에(מָנוֹר, ζυγός, yoke)


멍에. 멍에’란 소나 말 등의 동물에게 쟁기를 채우거나, 써레나 수레를 끌게 하기 위해 목과 등에 감아 거는 기구인데요. 자신의 몸 위에 걸쳐지지만, 짐을 편하게 지거나 끌게 되는 이점이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농사에서 멍에는 큰 소와 작은 소 두 마리를 한 겨리 안에 묶어서 밭을 갈게 했습니다. 이때 어린 소와 경험 많은 큰 소를 한 쌍으로 겨리를 지웠습니다. 이때 어린 소는 크게 힘쓰지 않고 큰 소를 따라다니며 일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 동행, 일치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멍에’는 짐을 함께 지거나 힘든 길을 함께하는 '동행'을 의미하십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두 몸이 하나가 되게 합니다.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 동행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시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늘 나와 함께하고 싶은 “예수님의 마음”이 멍에입니다.


그 마음은 그저 소나 말처럼 온순할 뿐만 아니라, 종으로서 타인을 섬기는 마음이며. 우리를 ‘쉼’과 ‘안식’으로 안내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ἀνάπαυσις)을 얻을 것이다(you will find)”(마태 11,29)


“얻을 것이다”의 어원은 “찾다εὑρίσκω”, “발견하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안식”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참 안식’을 찾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의 '멍에'는 언제나 나와 함께하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분 안에서 참사랑을 배우고 더불어 안식까지 얻어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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