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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Jul 15. 2021

소금단지

양지지효(養志之孝)


# 큰아들과 작은아들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두 아들을 키운 한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큰아들은 사업에 크게 성공했습니다. 큰아들 집에 가면 넓은 집과 풍성한 식탁, 좋은 옷들을 대접받았습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풍족했지요.


그런데 작은 아들네는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했습니다. 작은 아들네는 생활하기가 빠듯해서 항상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작은 아들네 집에 가면 늘 손주를 봐주어야 했고, 집안일도 거들어야 했습니다. 없는 집에 자식들은 많아서 어머니는 허리 펼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큰 아들네 보다는 작은 아들네 집에 머물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장남이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동생네는 자기들 먹고살기도 힘들어요. 어머니가 그곳에 가시면 부담스러워할 겁니다. 제가 더 좋은 음식과 옷으로 잘 봉양할 테니, 저희 집에서 사세요.”


그 말에 어머니는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좋은 음식과 옷이 아니란다. 네 동생은 힘들게 일하고 돌아와서도 밤마다 내 등을 긁어주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학교에서 돌아온 손주들은 그날의 재미있는 일들을 들려준단다.”


# ‘봉양奉養’과 ‘양지養志’


흔히 효를 말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말이 ‘봉양奉養’과 ‘양지養志’입니다.


봉양은 부모님을 받들어 모시는 것을 말하지요. 부모님이 편히 살도록 돕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봉양보다 더 큰 효를 '양지지효(養志之孝)'라고 합니다.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서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데요. 부모님의 마음이 기뻐하는 것을 살펴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춘추시대 楚(초) 나라 사람 老萊子(노래자)는 70세가 되어서도 색동옷을 입고 어버이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피워 늙은 어버이의 나이를 잊게 하기도(班衣之戱반의지희) 했는데요.


큰아들이 어머니를 봉양했다면, 작은아들은 양지지효를 실천한 것이지요.


# 해석의 문제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일반적이고 개념적으로 정의된 법을 구체적인 사안에 적용하고 집행하는 데 있어서 쟁점은 해석의 문제에서부터 시작되지요.


유대인들은 성경해석이 ‘신의’(神意-하느님의 뜻)를 헤아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율법학자, 또는 라삐들은 율법 규정을 현실에 맞게 해석한 ‘주해서(미드라시)’를 많이 남겼는데요. ‘조상들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곤 했습니다.


문제는 율법해석이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과 에세네파가 저마다 다 달랐다는 것인데요. 좀 비약적인 표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율법해석’을 잘못하면 ‘이어령비어령耳懸鈴鼻懸鈴’-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이 될 수도 있었다는 말이지요.


# 유전무죄 무전유죄


오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먹기 시작하였지요.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따지듯이 말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 12,1-2.)


바리사이들의 눈에 밀 이삭을 뜯은 것은 안식일에 추수를 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긴 것이었고,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면 타작하지 말라는 조항에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또 손으로 비벼서 후후 불어 껍질을 털어냈다면 키질을 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지요.


또 안식일에는 편지를 뜯는 것도 불을 지피는 행위도 금지사항입니다. 닭이 안식일에 알을 낳았다면 그 역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는 율법에 이토록 많이 또, 철저히 갖가지 규정을 만들어 붙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뜻(본질; 계란)보다는 율법 규정과 그 형식(계란 껍데기)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율법의 근본 뜻을 망각했지요.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께 야단을 맞습니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6-9.13.)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율법의 근본정신을 망각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율법으로부터 하느님 사랑의 법으로 파스카 할 수 있기를. 법이 인간 위에 군림하고 인간이 법을 위한 노예가 될 때, 비인간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지요.


형식(봉양)도 중요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살피는 일(양지)이 먼저입니다. 율법의 본질입니다. 봉양보다는 양지지효를 실천할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7; 마르 2,27; 마태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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