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루가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가고 있을 때. 한 영감은 호미로 고구마를 캐고 있고 꼬마 마리오는 한 영감이 캔 고구마를 손수레에 옮겨 담고 있다.
"그렇구나.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의 온도가 어제와 다르더니 정말 가을이 온 것 같구나." 일 손을 멈추고 얼굴의 땀을 닦던 한 영감이 허리 펴고 일어섰다.
"네... 바람 냄새도 가을향기로 바뀌었구요. 뒤뜰에 서 있는 사과나무의 사과들도 가을 색동옷으로 옷을 갈아입었어요. 또 저기 건너편 들녘에 고개를 숙이고 익어가는 벼이삭들도 어제와 달라 보여요."
"그래. 그러고 보니 네 말이 맞는 것 같구나. 봄이 어제 같았는데... 그 새 산과 들이 가을빛으로 변해가는구나.
"우와... 할아버지! 저기 저 산 좀 보세요. 저 산 너머로 지는 노을요. 와! 아름다워요."
"어허. 참으로 장관이구나... 저녁노을이 유난히 붉은빛인 걸 보니 하늘이 풍년을 함께 기뻐하고 있는 게 분명해."
"완전 아름다워요. 울긋불긋. 만일 저 노을을 만져볼 수 있다면 분명 붉은색 비단을 만지는 것 같겠죠? 그렇겠죠?"
"그래. 보기에도 비단결처럼 곱구나."
장마가 그치고 오랜만에 민낯을 보여준 하늘을 보며 한 영감과 마리오는 잠깐이지만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요. 할아버지. 천국은 어떤 곳이에요?" 하늘과 눈 맞춤을 하고 있던 마리오가 시선을 한 영감의 주름진 얼굴께로 옮기며 물었다.
"천국.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냐?" 한 영감은 뜬금없이 던져진 마리오의 엉뚱한 질문에 당황스러워하며 캐다만 고구마 이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난번에 할아버지하고 서울역을 지나갈 때 팻말을 든 삼촌들이 그랬잖아요. 화가 많이 난 목소리로 천국 어쩌고 지옥 저쩌구 그랬는데... 그때도 제가 할아버지한테 물었어요. 천국은 어디고 또 지옥은 어디냐구요. 그때도 할아버지는 지금처럼 대답을 안 하시고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피하셨어요. 제가 그때 할아버지를 뒤쫓아가느라고 얼마나 숨이 찼는지... 할아버지는 모르시죠."
"허허허. 별걸 다 기억하고 있구나." 한 영감은 이번에도 그때 그날처럼 애써 마리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여기저기 흩어진 고구마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 한 영감의 심기를 알아차렸는지 마리오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마리오." 고구마가 한 수레 가득 찼을 즈음 한 영감이 꼬마의 이름을 불렀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네. 할아버지. 알겠어요." 강아지 복돌이랑 함께 고구마를 캐던 마리오가 바지런히 움직이던 손길을 멈추고 밭 가운데에 앉아있는 한 영감에게 다가가며 대답했다.
"목마르지? 물 한 모금 마시고 집으로 가자꾸나." 한 영감이 물을 따라 꼬마에게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마리오야. 사실 할애비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 모른단다. 그래서 아무것도 말해줄 수가 없구나."
"천국이 여기서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그곳에는 누가 사는지도 모르세요?"
"으응. 할애비는 아직 그곳에 가보지 못했거든...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단다. 아주 아주 먼 옛날.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들려주신 이야기인데."'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때보다 더 먼 옛날인가요?"
"허허허. 그래. 그때에는 지금처럼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살지 않고 밭에 흩어져 자라고 있는 고구마처럼 여기저기서 흩어져서 가족끼리 어울려 살던 때의 이야기란다."
"그때에는 성벽도 없었고 나라도 없었고 임금도 없었나요?"
"으응. 그때에는 모두가 다 친구였지. 곡식을 저장할 창고가 없었으니까. 도둑도 없었고 싸워서 남의 것을 빼앗을 필요도 없었단다. 배가 고프면 들이나 산, 강으로 가면 됐으니까. 일용할 양식은 그날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해결했단다."
"우와. 그런 때가 있었어요?" 꼬마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으응. 평화롭고 모두가 행복한 날들이었지. 하늘과 땅을 다스리던 신들도 세상 사람들이 서로 행복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기뻐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신이 세 명의 아들 신들을 불러 모으고 이렇게 말했단다."
"뭐라구요? 무슨 말을 했나요?" 마리오가 한 영감 곁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물었다.
"아버지 신은 세 명의 아들들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단다. '나 혼자서 하늘나라의 일과 세상의 일 살피기에는 벅차구나. 오늘부터 너희는 세상에 내려가 삼백 하고도 육십 오일 동안 지내다가 오너라. 그런 후에 나와 함께 세상 일을 살필 신을 가려보자꾸나.'"
"아. 아버지 신이 참으로 현명한 생각을 하셨네요. 혼자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되면 힘도 들고 좋은 결정을 내기기가 힘들 테니까요. 저는 아버지 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꼬마가 아버지 신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상에 파견된 아들들은 각자 서로 삶을 살았는데. 첫째 아들은 세상에 파견되자마자 스스로 '천자'라 칭하고는 사람들에게 큰 궁전을 건설하게 했단다."
"성벽을 쌓았나요?"
"안타깝지만 그랬단다. 앞으로 천년만년 하늘나라와 세상을 다스릴 왕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 굳게 믿고 있었던 첫째 아들은 아주 큰 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럼. 이집트의 피라미드 같은 그런 어마어마한 건물 말인가요?"
"으응. 뿐만 아니라 천상을 쉽게 오를 수 있는 탑도 쌓게 했지."
"바벨탑 같은 탑 말이에요?"
"첫째 아들이 원했던 탑은 그 보다 더 높았단다. 아버지를 능가하는 힘을 얻고 싶었고 또 그런 힘과 권력을 자랑하고 싶었단다. 결국 첫째 아들은 일 년 만에 으리으리한 궁전과 성벽, 그리고 어마어마한 높이를 자랑하는 탑을 완성해서 그 이름을 세상에 전설로 남길 수 있었지. 하지만 첫째 아들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힘과 권력의 맛을 알게 되었고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위해 매일매일 싸움과 전쟁을 해야만 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