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에서 저수지를 바라보니까. 마음이 탁 트이는 것 같고 근심도 저기 저 깊고 넓은 물속으로 사라진 것 같아요. 할아버지. 아까 출렁다리에서는 약간 무서웠는데..."
"허허허... 그랬구나. 할애비가 느끼기에는 출렁다리가 무서울 정도로 출렁거리지는 않았던 거 같았는데."
"저두 그랬어요. 제가 무서웠던 거는 다리 위에서 술 취한 어떤 아저씨 때문이었어요."
"아. 우리 바로 뒤에서 자기 가족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아들에게 손지검을 하던 남자 말이구나."
"네... 저보다 어린아이였는데...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네 마음이 아팠다니. 할애비가 다 미안해지는구나. 분명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상황이나 사연이 있었을 게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 상황은 결코 훈육하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말씀하시는 것도 아버지가 자녀에게 할 수 있는 말들이 아니었고요. 폭언과 폭행이었다구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정말 악한 사람이었어요. 세상에는 왜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많죠? 악은 왜..."
"그래. 할애비도 그건 인정한다. 술이 많이 취한 것 같더구나. 할애비가 할 말이 없다."
"아무리 취했어도. 그 아저씨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마리오는 아직도 감정이 풀리지 않은지 씩씩거렸다.
"마리오. 여기 이런 글이 있구나. 한 번 읽어 보겠니?" 한 영감이 흥분한 듯 보이는 마리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화제를 돌리려 기둥에 붙여진 명언에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인도하는 힘은 의지력에 달려 있다. 기둥이 약하면 집이 흔들리듯, 의지가 약하면 생활도 흔들린다. 에머슨." 기둥에 붙여진 글귀를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는 사이 마리오의 감정도 누그러졌다.
"마리오. 처음부터 나쁜 사람, 혹은 악한 사람은 없단다. 한 사람의 성장 배경이나 가정환경 같은 여러 가지 조건들이 그 사람을 좀 더 나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정말 악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지. 하지만 단편적인 사건만 바라보고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야. 언젠가 네가 악에 대해서 물었을 때 할애비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성인은 악에 대해서 '선의 결핍'이라고 했다고 했던 말 기억하고 있지?"
"네..." 마리오가 고개를 떨구며 끄덕였다.
"그래. 처음부터 악한 사람은 없단다." 한 영감은 고개를 떨구고 있는 마리오의 어깨를 끌어안아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런 이야기가 있단다. 마리오. 아주아주 오랜 옛날 신은 인간을 위해 아주 특별한 세 가지 선물을 준비했는데... 이성과 의지와 욕망이었단다."
"이성과 의지와 욕망요? 주시려면 눈에 보이는 것을 주시지..." 마리오는 호기심 반 실망 반이 섞인 표정이다.
"허허허. 그러게 하지만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크고 깊어서 영원히 닳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이성과 의지와 욕망을 주셨단다. 이 세 가지가 지금 마리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곧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마리오도 네 안에 있는 이성과 의지와 욕망이라는 신의 선물을 곧 보고 느끼고 알게 될 거야."
"그런데 신의 선물하고 악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요?"
"그렇지 할애비의 이야기가 잠깐 다른 길로 새었구나. 우선 신의 선물인 이 세 가지는 인간에게 엄청난 힘을 갖게 한다는 것부터 알아두어야 해. 그리고 이 세 가지 선물 중에 매우 조심해야 할 선물이 있다는 것도 알아 두어야 하고."
"우와. 점점 재밌어지는데요."
"세 가지 선물 중에 우선 이성에 대해서 알아볼까?"
"네..." 마리오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한 영감을 바라봤다.
"이해하기 쉽게 이성은 인간의 머리, 곧 정신에 그 자리가 있고. 의지는 가슴, 그리고 욕망은 소화기관에 그 자리가 있다고 상상해보거라."
"네. 머리에는 이성. 의지는 가슴. 욕망은 배." 마리오는 손으로 머리와 가슴과 배를 만지며 할아버지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렇지. 이성이라는 선물은 영원한 신의 눈동자를 닮아서 참되고 올바르며 아름다운 세상은 물론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단다."
"우와~ 대박. 진짜요?"
"그럼. 당연하지. 그리고 의지라는 선물은 지칠 줄 모르는 신의 심장을 닮아서 인간은 때때로 자기 자신을 뛰어넘을 수도 있단다. 그래서 어떤 때는 황소 열두 마리를 능가할 때도 있지."
"헉. 거짓말 같아요."
"허허허. 인석아. 비유를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 그런데 말이야. 문제는 욕망이란다."
"욕망요? 욕망이 왜요? 사람의 배에 비유된다면서요. 배탈을 일으키나요? "
한 영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안타깝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닌데. 자주 그럴 때가 있지. 욕망은 야누스처럼 두 얼굴을 가졌는데, 한쪽의 얼굴은 언제나 신들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어서 평화와 사랑, 고귀하고 숭고한 것들을 원하지만, 다른 한쪽의 얼굴은 전쟁과 편견, 오해와 집착, 탐욕과 절망스러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단다. 이 때문에 신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에서 타인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지."
"에휴!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악을 선의 결핍이라고 했군요."
"허허허.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아주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만 결핍된 자기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 세상과 이웃의 평화를 위협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언제나 이성과 의지로 욕망을 절제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중하고 또 서로를 이해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이제야 에머슨 아저씨의 말씀이 이해가 되네요.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인도하는 힘은 의지력에 달려 있다."
"자~ 이제 우리도 우리의 허기진 배를 채우러 슬슬 내려가 볼까?"
"하하하. 넵. 하지만 배탈 나지 않을 정도로..."
"허허허. 그래.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면서..."
한 영감과 마리오가 '예당정'을 내려오는 사이 예당호의 분수가 힘차게 물을 뿜으며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가을이 아주 조금씩 익어가는 하늘 아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