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 막달라 마리아편
선과 악, 성과 속,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복음을 전하던 예수가 허무하게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온기 없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무덤에 묻혔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의 무덤을 찾아 나선다. 사랑하는 예수를 만나러 가는 길에 마리아는 그동안 자신을 포함해 예수의 공동체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되짚어보았다. 언덕을 넘어서오는 빛과 그 아래 그림자 사이, 짙게 깔린 안개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기억들이 그녀의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십자가 사건과 그리고 마지막 만찬에서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하신 예수의 말씀들. 하나하나가 마디마디 펼쳐지며 떠오른다. 서러움이 복받쳐 오르고 슬픔이 목에 걸려 왈칵 눈물로 쏟아졌다. 그런데 흐르는 눈물 사이로 그녀를 당황하게 하게 일이 벌어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어 한 걸음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나를 붙잡지 마라
사랑을 잃었다
가야 할 곳이 사라졌다
둘러봐도 마음 둘 자리가 없다
돌아갈 곳 없는 그녀에게
천사가 물었다
여인아 왜 우는가
누구를 찾는가
어디에 모셨나요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마리아야
라뿌니
나를 붙잡지 마라
철학자 장-뤽 낭시(Jean-Luc Nancy, 1940~)는 예수가 부활절 새벽에 처음 만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라고 하신 말씀에 주목하며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역설이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마르 14,22; 마태 26,26-30; 루카 22,14-20)와 "나를 만지지 마라."(요한 20,17)는 예수의 말씀이라고 한다.(『나를 만지지 마라』, 30-31쪽)
물론 그가 주목하고 있는 말씀인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ἅπτομαι, touch) 마라" 하신 말씀(요한 20,17)이 부활한 예수, "그의 몸이 공기화 된 육체, 혹은 비물질적인 몸, 유령의 몸, 환영으로서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지 않음을 낭시는 명확히 한다.(31쪽)
그렇다면 마리아는 예수를 만지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영원성)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어떻게 예수의 몸을 느끼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의 현존을 만날 수 있는가? 어떻게 예수의 떠남 속에서 (존재하는) 그의 진짜 현존과 '접촉'할 수 있을까?
예수는 오랫동안 제자들에게 자기와 형제(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부활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 이미 말씀해 주시면서 오늘 마리아와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주신 바 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요한 16, 7) 만일 오늘 마리아처럼 부활한 예수와 ‘진정한 접촉’을 원한다면, 다시 죽지 않는 그의 현존과 접촉을 기대한다면 예수가 아버지께로 그렇게 떠나야 우리가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접촉할 수 있음을 예수는 이미 제자들에게 가르쳐왔다.
그러므로 '진정한 접촉'이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때에만 가능하다. 만약 그 간격이 제거되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접촉이 아니라 혼합이고 흡수이다. 다시 말해 '가장 가까운 거리'가 접촉의 보편적인 조건이다. '가장 가까운 것'은 (절대로) 동일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멀리 있다 하여 별개의 것도 아니다. 종교와 철학, 사랑 그리고 예술이 그렇다.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 당김과 밀침, 낯섦과 친근함, 기대와 절망 사이에서 가볍게 흔들리고 있는 이유도 서로의 경계를 인정하면서 접촉하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인용: 이선영, 책마당, 2015년 10월호)
하지만 마리아의 마음과 몸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도마처럼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을 몸의 접촉으로 확인받고자 한다.
"라뿌니!"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놀라움과 반가움에 접촉하려는 마리아의 마음과 이를 막아서는 예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
앞서 거론되었지만 부활한 예수와의 진정한 접촉, 달리 말해 다시 죽지 않는 그의 현존 체험은 예수가 그렇게 떠나야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낭시가 주목하고 있듯이 '나를 만지지 마라'는 부활한 예수의 뜻은 예수를 "만지지 않으면서 그의 영원성에 다가가라”는 것이다. 그의 명백한 현존을 만져서 느끼지 않으면서도 그의 떠남 속에 존재하는 그의 진짜 현존에 다가가라는 것”(31-32쪽)이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죽으시고 묻힌 예수에게 그의 부활은 전적으로 하느님에 의한 수동적 사건이다. 곧 하느님에 의해서 죽은 예수가 "죽음에서 벗어나신 동시에 높임을 받으시고 하늘에 올라가셨다"(필립 2,9; 사도 2,33; 5,31; 로마 10,6-9; 에페 4,8-10).
이런 맥락에서 예수의 부활을 융기(隆起, surrection), 즉 '들림'이라고 수동적인 의미로 정의하고 있는 낭시의 말에 공감이 간다. 낭시의 말대로 부활이 하느님에 의한 수동적 들림이라면 부활은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것, 타자인 것, 사라지는 도중에 있는 것"이고 "몸 자체 안에서, 몸으로서 돌출하는 것"이다.
부활했지만 여전히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타자의 몸으로 마리에게 나타난 예수. 그리고 두렵지만 반가움에 그와 접촉하고 싶어 하는 마리아. 그 긴박한 긴장감을 예수는 한 마디로 떨쳐낸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나를 보고 있다. 하지만 그대가 '본다'하여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현존'하는 것은 아니다. '봄'이 곧 '현존'이 아니듯이 '봄'이 '접촉' 또한 아니며 '만짐'이 될 수 없다. 왜냐면 만짐 그 자체가 즉각적으로 '또 다른 현존'을 형상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야! 그대는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이 말씀이 마리아에게 중요한 이유는 믿음의 본질이란 보지 않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의 본질은 접촉하고 싶은 마리아에게 주지되어야 하겠지만 감각적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던 도마에게도(요한 20,29) 낙심하여 눈이 가리어진 채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도( 루카 24장) 다시 한번 그 중요성이 입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신앙은 감각적이며 이성적이고 인격적인 만남을 요구한다. 성령의 작용이 원초적이면서도 초월적인 경계를 넘나드는 이유인 것이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마리아야!"
"라뿌니!"
마리아는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을 듣는 순간 그가 예수란 사실을 알고 믿었다. 자기를 부르는 그 음성에서 마리아는 어떻게 예수를 알아봤을까? 분명한 것은 ‘봄’과 ’ 들음‘의 차이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부활한 예수와 마리아의 대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리아가 처음부터 부활한 예수의 봄이나 음성에서 생전의 예수를 알아채지는 못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요한 20,15)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면서 동시에 제자들의 이성을 초월하는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인격적인 부활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이 인간의 감각과 이성의 한계를 초월해 있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리아야!
"라뿌니!"
“나다.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그리고)
나를 만지려 하지 마라, 나를 붙들려하지도 마라, 찾거나 붙잡거나 막지도 마라. 몸과 마음이 원하는 모든 집착을 포기해라.
우리의 몸은 진리의 그림자를 볼뿐이다. 진리 그 자체를 볼 수 없다. 자기중심적인 마음의 눈, 그 너머 영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진리는 절대적으로 명증 되기를 거부한다.
"진리는 절대적으로 귀결을 허용하지 않는다. (…) 중요한 것은 어둠 속에서 눈을 여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낭시, 76쪽)
진리는 인간의 인식과 정신의 패러다임이 추구하는 결론에 구속되기를 거절한다. 진리는 그 어디에도 머물거나 소유되기를 망설이지 않고 부정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