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속의 인간
“어떤 환경에 몸을 맡길 것인가 – ‘있는 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길”
이사(李斯)는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제국을 건설한 진시황의 1등 공신이었다. 이사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승상 자리에도 올랐다. 그런 이사도 젊은 시절에는 보잘것없는 지방의 말단 관리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는 쓸모없는 잡동사니를 넣어둔 창고에 살던 쥐가 애처로울 정도로 말라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곡물 창고에 사는 쥐는 통통하게 살이 올라 유유자적하게 어슬렁거리는 것을 봤다. 그 순간 이사는 섬광과도 같은 통찰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몸을 맡기는 데 따라 인생의 가치와 격이 달라지는 게 아닐까? 이리하여 이사는 자신을 키우기 위해 우선 실력을 기르는 곳을 찾았다. 그가 몸을 맡긴 곳은 법가사상과 성악설을 주창한 순자학당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본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나라로 진나라, 진시황에게 자신의 몸을 맡길 선택을 한다. 마침내 이사는 천하통일의 계책을 진시황에게 전했고, 진나라의 재상으로 등용돼 중국 통일이란 대업에 결정적 공을 세웠다.
그렇게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어느 날, 외국 출신의 한 인사가 문제를 일으키자 진나라 조정에서는 타국 출신 신료의 축출을 명하는 ‘축객령(逐客令)’을 내렸다. 초나라 출신으로 진나라의 고위직에 있었던 이사 역시 그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사는 축객령을 거두라는 상소를 올려 자기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한비자가 진시황에게 중용되려 하자 자신이 반대한 축객령을 들먹이며, 한비자는 한나라의 공자이므로 진나라의 이익에 반하는 의견을 낼 수 있다고 모함한다. 그런데 진시황이 죽고 자신의 세력이 약해지자 이사는 환관 조고의 모함과 협박에 휘말려, 요참형(腰斬刑)으로 처형당하며 3족이 몰살당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이사의 삶은 젊은 날 환경의 중요성을 통찰하고 야심을 실현하는 데 성공했으나, 권력과 이해관계에 얽혀 자기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파멸로 치닫게 된 한 인간의 비극이었다.
반면, 모세는 ‘가난과 비천함’을 벗어나기 위해 세속적인 출세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양을 치던 중 하느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탈출기 3,14)라고 자신을 드러내시며, 고통받는 백성을 해방시키시겠다는 뜻을 밝히십니다. 이 ‘있는 나’이신 하느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며, 이집트에 억눌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1. 환경, 그리고 ‘어디에 몸을 맡길 것인가?’
이사가 말한 ‘환경의 중요성’은 현실적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물리학이나 환경학에 주장하듯 사물을 둘러싼 조건(온도, 압력 등)이 그 물체의 운동과 상태에 큰 영향을 준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창고 쥐도 어떤 창고에 있느냐에 따라 체형과 생활방식이 달라지지요.
이사는 바로 이 원리를 인생에 적용했습니다. “자신이 속한 국가와 리더를 잘 선택하면, 더 큰 부귀와 권력을 얻을 수 있다.” 그 깨달음 자체는 현실적이었으나, 문제는 그 선택의 동기가 단지 ‘자기 이익 극대화’에만 집중되었다는 점입니다.
모세 역시 ‘환경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 치며 조용히 살 수도 있었고, 이집트 궁전에서 학습했던 지식을 살려 세속적인 길을 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고, 현실적으로는 힘겨운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마침내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종의 신분) “거룩한 땅”(탈출기 3,5)에 서게 됩니다. 모세는 선하신 주인께 자신의 인생을 의탁하고 그분의 크신 뜻과 계획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어떤 환경에 몸을 맡길 것인가?” 순간적이고 무의미한 세속적 환경이나 부귀영화를 위해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야훼 하느님 ‘있는 나’이신 하느님의 부르심과 사랑의 환경 안에 뿌리내릴 것인가? 바로 그 선택이 우리 인생의 진로와 결말을 결정합니다.
2. ‘나는 있는 나다’ – 절대적 토대이자 힘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나는 있는 나다.”(탈출기 3,14)라고 계시하신 것은, 수학적으로는 ‘절댓값’(Absolute Value) 혹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기준’을 연상케 합니다. 변할 수 없는 기준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값을 비교·정의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나는 있는 나다’라는 말씀은, 하느님만이 절대적 토대요 변하지 않는 분임을 선언합니다.
시편 103편은 이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렁에서 건져 내시는 분”으로 찬미합니다.
1코린 10장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 백성 역시 영적 양식과 음료를 동일하게 받았지만, 교만과 투덜거림으로 인해 광야에서 멸망했다고 지적합니다.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1 코린토 10,12)라는 말처럼, 우리는 절대적 존재이신 하느님 앞에 끝없이 겸손해야 합니다.
3. 회개의 요구와 무화과나무의 비유
오늘 복음(루카 13,1-9)에서 예수님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하고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주시는 하느님의 인내심과 동시에, 만약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잘려 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경고하십니다.
이사는 젊은 날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키워 높은 곳까지 올라갔지만, 결국 ‘자기중심적 권력욕’에 사로잡혀 참된 회개와 겸손을 잃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역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주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주인은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제가 거름을 주겠습니다.” 하고 간청합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열매 맺도록 돕기 위해 끝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회개’란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관성(慣性)과 욕망이라는 물리학적 운동을 바꾸려면, 더 큰 힘이 작용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나는 있는 나다.”라고 하신 주님의 절대 기준 안에 우리의 삶을 정렬(整列)시킬 때, 비로소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4. 함께 묵상합시다
환경과 동기: 이사처럼 단순히 ‘좋은 환경에 몸을 두면 성공한다’는 계산에만 갇히지 맙시다. 우리가 바라야 할 환경은 ‘하느님의 뜻’ 안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우리의 책임: 하느님은 참으로 자비롭고 너그러우십니다. 그러나 우리도 응답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하듯, 회개하여 삶을 바꾸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겸손과 경계: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 한비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사, 그리고 무화과나무. 모두 우리에게 “겸손하고 깨어 있으라.”는 메시지를 줍니다.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을 늘 기억합시다.
구체적인 실천: 깊은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해 ‘있는 나’이신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기. 자신의 삶에 놓인 욕망과 집착을 성찰하고, 구체적으로 내려놓을 결심 세우기. 주변에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모세처럼 찾아가 돌봐주기.
이사의 이야기는 환경을 바꿔 성공을 좇되, 회개 없는 권력욕이 얼마나 허무한 끝을 맞는지 보여줍니다. 반면, 모세와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참된 생명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나는 있는 나다.”라고 하신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또 용서하시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내하십니다. 그러나 그 인내가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진정한 회개와 열매 맺음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땅에 뿌리내리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