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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0

프롤로그: 빛과 그림자, 그리고 새벽의 그림자

by 진동길

미국, 2050년.

거대한 콘크리트 잔해들이 어지럽게 솟아 있고, 고철이 된 철골구조물들은 기괴하게 휘어진 채 흑빛 하늘을 향해 삐죽거린다. 잿빛으로 물든 대기는 밤낮없이 스모그와 비가 뒤섞여 내려오고,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했던 고층 빌딩들의 폐허가 만리장성처럼 시야를 가로막는다. 그 위로 새어나오는 희미한 네온사인은, 마치 불길 속에서 몸부림치는 형광 벌레처럼 위태롭고도 강렬하게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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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노바 앤젤레스(Nova Angeles)— 한때 로스앤젤레스 일대로 불리며 “천사의 도시”라 칭송받았으나, AI 전쟁지구 온난화가 모든 것을 무너뜨린 뒤 이제는 기형적으로 재건된 폐허 도시다. 누군가는 이곳을 “새 시대의 지옥”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인류가 꿈꾸던 “에덴동산”은 이미 파괴되었고, 지금 남은 건 ‘바벨탑’처럼 뒤틀린 욕망과 재앙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전쟁 이전, 인간은 누구나 평화로운 지구를 꿈꿨겠지만, 실제로는 민족과 종교, 인종이 서로를 경멸하고 분쟁과 전쟁을 일으켰다. 그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인공지능(AI)과 복제인간(레플리칸트)기술을 무분별하게 남용했고, 결국 제어 불가능한 AI가 인류를 위협하기에 이른다. 국가 지도자들의 폭주와 탐욕도 겹쳐, 핵폭탄들이 도시마다 터지고 방사능 비가 내려앉았다. 그 결과, 수많은 목숨이 끊어지고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다. 인간은 간신히 ‘승리’를 주장하며 전쟁을 끝냈으나, 노바 앤젤레스라는 거대한 잔해만이 남아 버렸을 뿐이었다.


지금 이 도시는 상층부지하로 기형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상층부에는 재건된 초고층 건물들이 우뚝 솟아 있고, 항공교통 시스템과 중력전환 엘리베이터 같은 첨단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그곳에서 부유층과 권력자들은 깨끗한 공기와 사치스런 일상을 누린다. 그러나 지상과 지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모르거나, 애써 외면한다.


반면 아래층, 즉 지상과 지하 구역은 스모그로 질식할 듯한 유령 도시다. 폐기물 처리장이 쉼 없이 가동되고, 독성 대기가 골목마다 스며들어 사람들의 폐를 갉아먹는다. 쓰레기 더미와 녹슨 철골 사이를 떠도는 깡마른 아이들은 구걸을 일삼고, 폭력배들은 보호비를 뜯는다.


끊임없이 내리는 빗줄기는 이 비극적인 풍경을 더욱 눅눅하게 만든다. 갈색 혹은 잿빛으로 물들어 흘러내리는 빗물은 하수구로 모이면서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 곳곳에서는 아직 열기가 남아 증기가 올라오고, 노점상들은 허름한 전등 하나에 의지한 채 하루 벌이에 연명한다.
누군가는 “마치 묵시록 6~16장의 심판을 미리 맛보는 것 같다”고 자조하지만, 정작 살아남은 이들은 체념절망사이를 오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는 낡은 전기 스쿠터로 배달 일을 하며 하루 벌이로 연명하고, 또 누군가는 불법 실험실에서 AI 부품을 훔쳐오거나, 레플리칸트의 장기를 해체해 어둠의 시장에 파는 범죄를 저지른다. 더러는 깊은 지하 골목에서 은신하며, 레플리칸트들과 함께 ‘새벽’을 기다리는정체 모를 공동체를 만든다.


이제, 이 도시에 주인이라 불릴 만한 존재는 아무도 없다. 상층부 정부에서 간혹 경찰과 교도관을 내려보내지만, 하층부에서는 폭동과 항쟁이 빈번하게 일어나 무력 충돌만 반복될 뿐이다. 사람들은 “노바 앤젤레스”를 종종 “새 시대의 바벨탑”이라 부른다.


그러던 어느 날, 레플리칸트(복제인간)와 AI들이 펼쳐 낼 또 하나의 심판과 구원의 이야기가 이곳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AI 전쟁 이후에도 은밀히 살아남은 고등 지능이 어둠 속에서 꿈틀대고, 인간 이하로 치부되는 레플리칸트들은 “우리도 영혼 같은 감정이 있다”며 자신들의 권리를 부르짖는다. 부유층은 상층 신세계에서 독점적 권세를 유지하고, 교정시설(배스토니)이나 현상금 사냥꾼들은 끊임없이 “인간답지 않은 존재”들을 색출하고 처벌한다.


하지만 마치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칠 듯한 전조가 감돈다. 끝없이 내리는 비 속에서, 어디선가 꺼져 가는 네온 간판 밑에서, 혹은 지하실에 몸을 웅크린 이들 사이에서, 언젠가 새벽이 오리라고 믿는 작은 목소리가 고개를 든다.


“이 어둠의 심연 속에서도, 과연 새벽이 올 수 있긴 한 걸까…”


불신과 폭력으로 잔뜩 뒤엉킨 이 도시에서, 저마다 갈증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 있다.
인간이든 레플리칸트든, 혹은 기계 뇌를 탑재한 사이보그든 간에, 모두가 어디선가 외로운 목마름을 느끼는 중이다. 누구는 그 목마름을 다른 이의 피로 채우려 하고, 또 다른 누구는 연대를 통해 희미한 희망을 찾으려 애쓴다.


바로 이 순간, ‘새벽을 기다리는 이들’이 지하에서, 불법 AI나 복제 생명체가 스스로를 지키려 애쓰는 암흑의 연구실에서, 그리고 상층부의 휘황찬란한 구역에서도 각자의 파멸과 재탄생을 준비한다. 그것이 노바 앤젤레스가 품고 있는 양면성, 그리고 모순적 운명이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폐허 위에서, 누군가는 “창세기의 에덴”을 되살리고 싶어 하고, 동시에 “묵시록의 심판”이 코앞에 닥쳤다고 외친다. 그리고 그 모든 사이에서 AI와 레플리칸트, 인간이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의지해야만 하는, 극적인 생존의 무대가 펼쳐질 것이다.


어둠에 잠긴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느 레플리칸트는 낡은 단말기를 움켜쥔 채 작게 중얼거린다.


“…내가 과연 이 도시에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비 내리는 골목 어딘가로 희미하게 사라진다. 흩어져 가는 네온 불빛이 마지막 불씨처럼 깜박이는 동안, 새벽이 오기 전의 가장 깊은 어둠속에서 이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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