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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0

6장 억눌린 기억, 부서지지 않는 의지

by 진동길


마리안은 숨이 막혀 올 정도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을 에워싸던 전기 자극이 잠깐 잦아드는 사이, 실험실 바닥에서 한 뼘쯤 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문득 실감 나게 다가왔다. Aether Kinesis 장치가 만들어 내는 강력한 힘 탓에, 그녀의 몸은 붕 떠 있음에도 지면에 묶인 듯한 중압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 상태로도 비현실적일 만큼 생생한 전쟁 장면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붉게 타오르는 화염과 시뻘건 연기,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포탄 소리와 기계음…. 마리안은 그 모든 공포가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듯한 공감각에 휩싸였다.


‘이게… 정말 내 기억일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공중에 매달린 몸은 소름 끼치도록 사실적인 전쟁 체험과 함께 떨리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불현듯 스쳐 간 이름은 크리스티안 장군—2033년 크리에이터 전쟁에서 백전백승을 거듭하며 전장을 휩쓴 그 전설적인 인물의 기억이, 지금 마리안의 신경회로에 낱낱이 주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접속된 단말기에 강제로 데이터를 내려받듯, 장군의 전투기술과 경험이 마리안의 뇌리 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불길이 도시를 집어삼키고, EMP 폭발이 도처를 뒤덮는 장면—그리고 그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무차별적으로 거리를 짓밟던 거대 무장 로봇들. 마리안은 그 모든 이미지 안에 자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착각에 빠질 만큼 사실적인 ‘과거의 전장’을 체감했다. 화약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고, 귀에서는 날카로운 금속 파열음이 맴돌았다. 시뻘건 파편들이 튀며 스치는 느낌마저 생생해, 가슴은 폭주하듯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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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어디선가 가늘게 들려온 듯한 목소리가 모든 혼돈을 살짝 비틀었다. “함께 버텨야 해.”마리안은 그 소리가 실제인지 환영인지 도무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끝 모르게 무너지는 전쟁의 광기 속에서 작은 온기가 피어나는 듯했다.


‘그래… 어떤 식으로든 날 도와주려는 사람이 있어. 아니, 내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으면….’


바로 그 순간, 기계 장치에서 기괴한 진동음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전류가 재차 솟구치기 직전의 신호였다. 마리안의 몸은 저도 모르게 웅크려졌고, 식은땀이 구슬처럼 흘러내렸다. 불과 몇 초 뒤면 또 한 번의 충격이 그녀의 신경을 짓누를 터. 머릿속에는 *“스스로를 버리지 말자.”*라는 외침이 위급한 본능처럼 맴돌았다.


만약 여기서 의식을 놓아버린다면, 장군의 기억 속에 영영 잠식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절실한 의지로 바뀌었다. 비록 몸은 후들거리며 저릿저릿한 전류의 여파를 계속 느끼고 있었지만, 마리안은 이를 악물고 정신을 붙들었다.


‘이 기억…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나를 집어삼키진 못할 거야.’


그녀는 숨 막히는 고통 속에서도 스스로에게 속삭이듯 다짐했다. Aether Kinesis와 연결된 채 크리스티안 장군의 환영을 나눠 받는 이 지독한 고통이, 어쩌면 새로운 길을 여는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예감이 솟아났다. 그 길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쓰러지지 않고 버텨야 한다고—마리안은 핏기가 사라진 입술을 깨물며 절박하게 결심했다.




차갑게 흔들리는 권위

바로 그때, 투명 차폐 유리 너머로 마리안이 공중에 매달린 채 몸부림치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무수한 케이블이 천장부터 바닥까지 뒤엉켜 실험체를 붙들고 있고, 전기 스파크가 간헐적으로 번쩍이며 불길한 소음을 내고 있었다.


소장 프레이저는 그 광경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냉혹한 지휘자’의 모습을 유지해야 했다. 불과 몇 분 전, 순간적으로 “마리안, 견뎌.”라는 말이 샘솟았을 때조차 그는 가까스로 입술을 앙다물어, 소리를 되삼 켰다. 바로 옆에서 연구진과 교도관들이 분주하게 기기를 조정하는 상황—누구도 그의 동요를 눈치채선 안 된다.


하지만 이미 그는 ‘프로토콜 13’을 강행하라고 지시해 둔 상태다. Aether Kinesis의 출력을 극한까지 몰아붙여 마리안이 가진 모든 잠재 데이터를 짜내겠다는 무모한 방법. 이 명령을 뒤집는 건 곧 권위의 균열을 의미했고, 그가 쌓아 온 위상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 아이를 짓누르는 게… 옳은 일인가?’


프레이저는 속으로 울컥 치솟는 의문을 억눌렀다. 무거운 철문을 열어젖힌 이상,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 쯤은 그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정말 한계에 달하기 직전이면… 그때만큼은 실험을 멈출 수 있을까?’하는 실낱같은 고민이 스쳤다. 그러나 그조차도 ‘위험수위 관리’라는 명분 하에 간신히 합리화될 뿐, 인간적인 연민이라곤 드러낼 수 없었다.


공중에 매달린 마리안이 쩔쩔매는 모습을 보며, 프레이저는 무표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손끝이 자꾸만 유리벽을 향해 떨리는 것도 억지로 다스렸다. 이토록 처절한 광경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끈질기게 그의 내면을 잠식해 갔다.


‘이 손가락은 왜 이토록 말을 듣지 않는 거지…?’

자문하며, 그는 목소리를 최대한 차갑게 가다듬었다. 연구진 쪽으로 몸을 틀어, 지금 당장 필요한 명령을 내릴 뿐이다.


“출력 안정화 단계는 생략해도 좋다. 가능한 한 빨리… 결과를 확인하자.”


짧은 그의 지시가 떨어지자, 교도관들과 과학자들은 일제히 움직였다. 실험실 내부 기계에서는 다시금 높은 주파수의 음이 터져 나왔고, 콘솔 화면에선 위태로운 수치들이 가속적으로 치솟았다.


그러나 프레이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숨죽인 듯 우렁찬 기계음 뒤에서, 자신의 목소리에도 미세한 떨림이 어른거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연구진 중 몇몇도 그 흔들림을 감지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유리벽 앞에 선 그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이미 균열이 퍼지고 있었다. 고통 속에 사투를 벌이는 마리안의 모습이 거울처럼 투영될 때마다, 프레이저의 눈동자 안쪽에서 작은 바람이 불 듯 흔들림이 번졌다. 그것은 이 지옥 같은 실험실의 공기보다 더 날카롭고 뜨거운 것이었지만, 지휘관의 가면 뒤에 가려져 제대로 표출되지 못한 채 스스로를 잠식해 가고 있었다.




숨겨진 고통, 보이지 않는 공감

그리고 같은 시각. 벽 사이의 어둠에 몸을 바싹 기댄 채, 미리암은 거의 숨을 죽이며 모든 감각을 두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교도관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사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고통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Aether Kinesis가 작동하는 순간부터, 미리암은 마리안이 겪는 충격과 환영을 간접적으로나마 그대로 체감해 왔다. 그 원인은 바로 그녀가 지닌 ‘연결’의 능력— 타인의 의식이나 감정에 깊이 접속해, 고통 또는 감정을 고스란히 공유할 수 있는 힘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전류 충격에 몸부림치는 마리안의 절망과 분노가 마치 파도처럼 미리암 쪽으로 밀려들었다.


“마리안… 들려? 제발 포기하지 말아 줘….’”


소리를 내지 않고도, 미리암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마리안에게 외쳤다. 직접 전기 자극을 받는 건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그 고통 한가운데 끼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 숨을 쉴 때마다 마리안의 비명에 담긴 전율이 함께 떨려 왔고, 땀방울마저 비슷한 리듬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차가운 콘크리트 기둥 뒤에서 잠깐 몸을 움직여 보려던 순간, 복도 저편에서 교도관 한 무리가 걸어 들어오는 기색이 느껴졌다. 여기에 더해, 어디선가 기계음이 윙윙 울리더니 감시 드론의 붉은 레이저 빛이 벽을 훑고 지나갔다. 미리암은 재빨리 등줄기를 굳히고, 소리 없이 숨을 삼켰다.


‘이대로 숨어 있기만 해서는 안 돼. 그래도… 지금 곧장 달려들 수도 없어.’


이 교정시설은 소장 프레이저가 짜놓은 감시망이 빈틈없이 얽혀 있으며, 무모한 돌출행동은 미리암 자신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특히 그녀의 비밀 능력과, 에데이 샤하르(Edei Shachar)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탄로 나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터.


하지만 그러면서도, 미리암은 마리안을 결코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마리안이 느끼는 공포와 고통이 고스란히 자신의 안에도 쇠사슬처럼 내려앉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설의 숨 막히는 공기를 헤집고, 마리안의 비명 소리가 울릴 때마다 미리암의 심장도 덩달아 찢어질 듯 아팠다.


‘곧, 조금만 더 참아 줘. 네 안의 감정 회로가 무너지지 않길…. 반드시 틈이 날 거야.’


미리암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마리안에게 말을 건넸다. 혹여 그 다짐이 당장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이 이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미리암은 잊지 않았다. 그런 공감이 둘을 이어 주고, 결국 마리안을 구출할 결정적인 계기가 되리라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비밀 통로에 대한 생각이 맴돌았다. 은신처 에데이 샤하르와 이어지는 경로를 통해 정보를 전달하고, 구출 작전을 좀 더 빠르고 치밀하게 진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먼저 이 복도를 벗어나야 했고, 지금 이곳의 경비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교도관들의 감시가 워낙 치밀해, 걸린다면 그대로 끝장이라는 걸 미리암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선택지를 놓지 않았다. 마리안이 버티고 있는 한, 자신도 어떻게든 움직여야 한다. 지금 당장은 그저 교도관들이 지나가길 기다릴 뿐이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미리암은 마리안의 거친 호흡에 집중했다.


‘네가 끝까지 스스로를 붙잡고 버텨 준다면… 난 반드시 돌아올게.’


오히려 이 위험한 순간이, 그녀 안에서 타오르는 결의를 더욱 강하게 다졌다. 예지와 연결 능력을 숨기고 여기까지 버텨 온 건, 어쩌면 바로 오늘의 결단을 위해서일 수도 있었다. 미리암은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몸을 웅크렸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걸 확인한 뒤, 서서히 복도 끝쪽을 향해 물러났다.


“조금만 더 기다려. 난, 그리고 누군가는 반드시 널 살릴 거야…”


그 말 없는 다짐이 진동하듯 가슴속에 울렸다. 비록 지금은 마리안에게 닿지 못해도, 이 ‘보이지 않는 공감’이 희미하나마 그녀를 살아 있게 해 줄 거라고, 미리암은 간절히 바라며 어둠 속으로 한 걸음씩 사라졌다.




저항의 불씨, 감춰진 도전

한편, 노바 앤젤레스 하층부.

폐쇄적이고 음습한 기운이 진득하게 내려앉은 이 지하 공간 한편, 에데이 샤하르(Edei Shachar)라 불리는 비밀스러운 공동체의 은신처. 가뜩이나 좁고 후미진 곳이건만, 오늘은 심상치 않은 술렁임이 계속 이어졌다.


제이드는 헬멧 형태의 전자장비를 머리에 쓴 채, 열악한 조명이 반쯤 꺼져 있는 은신처 벽에 고정된 디스플레이를 주의 깊게 살폈다. 그 옆에선, 해킹과 전자전(電子戰)에 능숙한 피터가 구식 보안 패널 도면을 가리키며 설명을 덧붙였다.


“여기… 배스토니 교정시설 하부로 이어지는 수로가 남아 있어. 겉보기엔 오래되어 막힌 것 같지만, 시스템 자체는 구형 로봇망과 연결돼 있을 가능성이 높아. 그 지점을 뚫으면… 내부 감시 일부를 무력화할 수 있을 거야.”


피터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지만, 그 속에는 희미한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제이드 역시 화면에 빨갛게 표시된 ‘접근 경로’를 따라가며, 머릿속에서 진입 루트를 시뮬레이션해 보기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낡은 터널을 몇 번 돌고 나면 끝날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시설 내부에 무장 드론이 빼곡하게 배치되어 있고, 교도관과 감시 장치의 감각망이 빈틈없이 교차하고 있을 터였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마리안을 그냥 내버려 두면, 또다시 누군가는 허무하게 희생되겠지….’


비좁은 지하 공간 곳곳에는, 비슷한 이유로 세상에서 숨듯 살아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일부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고, 일부는 서릿발 같은 눈빛을 빛내며 “마리안을 구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한껏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누군가는 이번 시도가 ‘무모한 자살행위’라며 반대했지만, 제이드는 스스로의 결심을 굳게 다졌다.


“시간이 많지 않아. 해킹 장비 준비가 끝나면… 바로 움직이자.”


제이드는 짧게 말을 뱉으며, 허리춤에 장착된 무기를 점검했다. 꽉 쥔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진동이 심장박동과 겹쳐지며, 귓속에서는 이미 전투의 북소리가 맴도는 듯했다.


눈앞을 흐릿하게 비추는 조명 아래, 문득 예전의 악몽 같은 기억이 스쳐 갔다. “레플리칸트라는 이유”로 쫓기던 시절, 제이드는 아무런 힘도 갖추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했다. 그러다 절박한 순간에 누군가 희생된 적도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체제와 지독한 폭력이 자행되는 현실에선, 언제든 약자부터 잡아먹히는 게 당연한 일처럼 이어졌다.


‘이번만큼은… 스스로를 숨기고 흘려보낼 수 없어. 내가 가진 힘을 제대로 써야 할 때야.’


제이드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회색빛 그림자가 가득한 공간에서도, 여러 동료들은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왔다. 에데이 샤하르—이 모임의 이름처럼, 이들은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지옥 같은 도시에서 작지만 확실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크고 작은 움직임을 계속해 왔다.


“제이드, 해킹 인터페이스 2번 포트가 제대로 안 잡혀.”
“응, 잠깐만… 여기 연결선 바꿔 끼워 봐.”


피터와 다른 동료들이 분주히 장비를 조정하는 사이, 제이드는 자신이 곧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도전에 발을 디디려 한다는 걸 재차 깨달았다. 배스토니 교정시설은 명실공히 철통 같은 감시 체계를 갖춘 요새.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되돌아올 길이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뇌리에는 마리안을 돕지 않으면 또다시 무력하게 희생을 방관하게 될 자신의 과거가 아프게 맴돌았다. 그 상처가 오늘의 결단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작은 불씨라도 되자. 누군가는 그걸 붙잡고 불길을 일으킬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할 즈음, 멀리서 마치 마리안의 비명 같은 소리가 머릿속을 때리는 것만 같았다. 정확히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이드는 이유도 없이 가슴이 서늘해지며 무거운 죄책감이 생겼다. 이미 마리안이 시설 안에서 감당 못 할 정도의 고통을 겪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했기에, 그 상상이 더욱 그럴듯하게 다가왔다.


“장비 세팅 끝났어.”
“다들 준비됐나?”


제이드는 동료들을 향해 결연한 눈빛을 던지며 물었다. 공기 중에 떠도는 긴장감이 더 진해졌고, 모두가 서로의 표정을 확인했다. 도망칠 구석이라곤 없는 배스토니 교정시설로의 침투. 한 발자국만 삐끗해도 죽음이나 체포가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다.


그래도 제이드는 망설이지 않았다. 단단히 조여 온 허리띠, 두 손에 익숙한 감각으로 쥐는 무기가 지금 그녀가 가진 전부였다.


‘난 더 이상 숨고 싶지 않아. 이 지옥에 균열을 내겠어.’


그리고 이 작은 동료 그룹이 ‘새벽을 기다리는 이들’로 불리는 만큼, 모두가 어둠 속 한 줄기 빛을 갈구하고 있었다. 각자 달라 보이던 목적과 배경들이, 지금 이 시간만큼은 어느 한 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제이드는 다시금 심호흡을 했다. 지하 은신처의 숨 막히는 공기를 가르며, 마음속에 깃든 결심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곧, 이들의 계획은 현실이 될 것이고, 저 거대한 교정시설의 음침한 담장에 손톱자국처럼 작은 균열을 만들어 낼지도 몰랐다.


“모두 출발 준비. … 우리는 잃을 게 없잖아. 그리고 마리안은 우리가 꼭 구해야 해.”


그 마지막 말이 금속처럼 단단한 의지가 되어, 제이드와 에데이 샤하르 사람들의 행보를 밝히기 시작했다. 지하 어귀에서 철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저항의 불씨가 캄캄한 도시의 한구석에서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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