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바벨탑처럼 솟아오른 블루 펜타곤
칠흑처럼 가라앉은 도시
노바 앤젤레스가 목격하는 아침은, 사실상 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일같이 수평선 위로 태양이 어렴풋이 떠오르긴 했지만, 오염된 먼지와 연무가 하늘을 뒤덮어 빛은 탁한 회색 필터를 통과할 뿐이었다. 식물이 광합성을 하기엔 햇볕이 너무나 미약했고, 종종 지표면에 내리는 붉은 빗물은 오래된 콘크리트 사이로 스며들어 도시 전체를 기괴하게 적셨다. 사람들은 피폐해진 땅 위를 무표정하게 걸어 다니며, 오직 살아남기 위해 침묵을 유지했다.
블루 펜타곤 — 지배자들의 성채
도시 중심에서 멀리, 예전의 워싱턴이라 불리던 땅에 블루 펜타곤이라 불리는 초거대 탑이 솟아 있었다. 마치 고대의 바벨탑을 연상케 하는 구조물은, 검푸른 합금과 투명한 방탄유리가 뒤섞여 묘한 색조를 띠었다.
고층 빌딩들도 반쯤 무너져 낮아진 주변 풍경 속에서, 블루 펜타곤은 섬뜩할 만큼 높이 치솟아 있었다. 바람에 실려 오는 고열과 방사능 먼지를 막아내기 위해, 탑의 바깥벽에는 수많은 필터 장치와 빛을 산란시키는 패널들이 달려 있었다.
모선 아라곤(Aragon)과 함께 작전 가능 요새
블루 펜타곤은 단순한 지상 건물이 아니다. 내부에는 핵추진 동력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탑 자체가 상공으로 떠올라 다른 작전 구역으로 ‘이동’ 할 수 있다. 펜타곤은 아라곤(Aragon)과 전투 순양함과 함께 움직일 때가 있다.
건물 하단부에서 쉴 새 없이 반짝이는 파란 광선은, 보는 이들에게 마치 우주선이 착륙했다 떠오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탑 주위에는 무수한 드론들이 벌떼처럼 대기하다가, 사이먼 벨(Simon Bell)의 지시에 따라 각종 군사 작전을 펼친다.
가까이 다가가면, 거대한 샤프트처럼 중앙에 뚫린 공간을 통해 사람과 화물, 로봇 병사들이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탑 외벽에는 고대 전승의 부조를 흉내 낸 듯한 형상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새로운 인류의 성취’를 상징한다고 선전되었다. 그 꼭대기에는 뾰족하게 솟은 제단 같은 구조가 있어, 구름이나 안개가 끼면 마치 천공(天空)을 찌르는 창과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
폐허가 된 주변 풍경
블루 펜타곤을 중심으로 사방이 반쯤 무너진 회색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시멘트 기둥과 콘크리트 덩어리들, 전쟁의 잔재를 그대로 간직한 채 서서히 풍화되어 가는 모습이, 이곳이 한때는 북적이던 대도시였음을 애써 부정하는 듯하다.
길바닥은 갈라져 붉은 장액(漿液) 같은 고인 물이 스며들어 있고, 드물게 살아남은 인간들은 텅 빈 눈빛으로 탑을 지켜보며 방황한다. 그들은 탑 아래서 뿜어 나오는 심해(深海) 빛 광선과, 드론들의 무시무시한 기계음을 들으며 매일을 버티고 있었다.
사이먼 벨의 성채 내부
탑 내부는 더욱 음침했다. 하부 구역은 장갑을 두른 드론들과 무장 병사들이 지키고 있어, 허가된 자 외엔 누구도 접근 불가했다. 중간층에는 정부 군부와 정보부서의 핵심 인력들이 상주하며, 각종 위성 감시 장치와 지구 전역에 깔린 인공지능 네트워크를 관리하고 있었다. 꼭대기에 가까워질수록 공기는 기묘한 정적을 머금었다. 차가운 합금 벽은 모든 소리를 흡수해, 사람들의 발소리조차 제대로 울리지 않았다.
이 탑의 최정상부에 거주하는 이가 바로 독재자 사이먼 벨(Simon Bell)이다. 그는 자신을 “새 지구로 인류를 인도할 지도자”로 선전하지만, 실제로는 무자비한 해킹 능력을 통해 세상의 모든 컴퓨터망을 장악하고, 반대 세력을 철저히 통제한다.
의외로 젊은 인상을 풍기는 사이먼 벨은 평소 짙은 청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군복 비슷한 옷을 입는다. 머리는 짧게 깎여 있고, 눈빛은 차가운 은색을 띤다. 레플리칸트 특유의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동작이 간간이 보이지만, 대중 앞에서는 항상 “완벽한 인간”을 연기한다.
그는 신격화된 통치자로서 늘 담담하고 권위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내면에는 치명적인 불안이 숨어 있다. “새 지구”라는 꿈을 찬양하는 연설로 인민들을 지배하지만, 실제로는 행성 이주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걸을 때마다 복도를 울리는 구두 소리에 맞춰, 주변 시선이 일제히 경계하는 걸 즐기듯 보였다. 실제로 사이먼과 마주쳤을 때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있는 부하는 거의 없었다.
사이먼 벨과 참모의 짧은 대화
블루 펜타곤 최상층 회의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뿌연 대기가 탑 아래를 뒤덮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창가 옆에 서 있던 사이먼은, 금속 벽면에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한동안 응시했다.
“현 상황 보고해. 두 개 남은 국가… 아직도 항복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고?”
옆에서 서류를 들고 있던 참모 한 명이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예, 각하. 그쪽도 자기들만의 지하자원과 농업 기반이 남아 있어… 바로 굴복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협박을 겸해… ‘새로운 지구행 프로젝트’에 참여하려면 우리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계속 역설 중입니다.”
사이먼은 살짝 코웃음을 치듯 미소 지었다. 그가 늘 구사하는 “다른 행성을 찾겠다”는 선전이, 사실 아무 근거도 없는 허상임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은… 궁지에 몰리면 어리석게도 허망한 희망에 매달리는 존재지. 그들이 내 말을 믿을수록, 내 통치는 굳건해지겠지.”
참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딘가 마음이 불편해 보였다. 그런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사이먼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혹시 의심 하나?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짧은 정적이 흘렀다. 참모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획 숙였다.
“아닙니다, 각하! 다만… 무력보다도 연구와 공존을 추구하면, 더 효과적으로….”
“지금 그 따위 말을 지껄이고 싶나?”
사이먼이 눈을 흘기자, 참모는 그만 목소리를 잃었다. 그러자 사이먼은 부드럽게 웃는 척하
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가 실은 레플리칸트라 해도… 아무도 모를 테지. 그리고 다른 별도 없다는 사실도, 지금은 내가 기만해야 할 카드일 뿐…”
그 말은 분명하게 참모의 귀에 들어갔지만, 그저 들은 척도 할 수 없었다. 참모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창밖 안갯속에서 깜빡이는 신호등과 고장 난 네온사인들, 그리고 황폐한 대지가 흐릿이 내려다보였다.
블루 펜타곤의 안팎
탑 외곽으로 무장 드론들이 시시각각 공중을 순찰하며, 탑 주위를 서성이는 난민이나 반군은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중간층은 매캐한 공기 속에서 병사와 보안 요원들이 화상 센서, 생체 인식기를 사용해 출입자를 통제한다. 높은 온습도 때문에 금방 기계장치에 먼지가 들러붙어, 주기적으로 로봇이 필터를 교체한다.
사이먼이 생활하는 블루 펜타곤 최상층에는 사이먼이 직접 관리하는 전산실과 개인 공간이 자리한다. 전산실에는 백여 대의 홀로그램 스크린이 사방 벽을 덮고, 사이먼은 그곳에서 세상의 모든 컴퓨터 망을 제어한다. “새 지구 탐사선”이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군수 물자를 관리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지구 반대편을 침공하기 위한 전쟁 준비물이기도 했다.
사이먼의 속내
사이먼은 회의실을 나와 전산실로 이동하며, 복도에 정렬해 있던 병사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모두들 두려움에 가득 차, 그의 발소리에 맞춰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즐기던 사이먼은 무심결에 혼잣말을 내뱉었다.
“내가 곧 국가다. 곧 내가 세계다. 내가 곧 그 반대편 국가들까지 무너뜨리면, 이 지구는 완전히 내 것이다. 그 후엔… 아무도 내가 레플리칸트라는 걸 모르겠지. 아니, 알아도 상관없어. 내 해킹력이 있는 한, 누구도 날 어찌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 입가에서 번져 나오는 미소엔 어딘가 서늘한 외로움이 서려 있었다. 모두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동료’는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사이먼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이미 모든 감정 따위는 지워 낸 줄로 믿고 있었다.
어두운 구름 속, 다가오는 전운
블루 펜타곤을 나서는 입구 쪽에선, 검푸른 하늘을 가로질러 길고 낮게 드론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이먼의 무자비한 통치를 상징하듯, 드론들은 서서히 늘어서서 도시 전역을 향해 분산되었다. 군부대가 잔불 정리하듯 추가 정복 전을 준비하는 움직임이었다.
안개 가득한 하늘 아래, 블루 펜타곤은 잿빛 지구의 중심에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오늘도 이동하고 있다. 인류가 살아갈 ‘미래’를 송두리째 집어삼키려는 욕망을 불태우며 세계 정복을 꿈꾸며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직은 알지 못하지만, 이 도시 어딘가에 작디작은 불씨가 생겨나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 불씨가 탑 위로 번져, 하늘에 피어오르는 불길이 되어 사이먼 벨의 야망을 무너뜨릴지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