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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0

12장 회색 하늘 아래, 거인들의 실루엣

by 진동길

회색 하늘 아래

오래된 도시 노바 앤젤레스의 지평선에선, 늘 회색빛 안개가 어둑이 깔려 있었다. 뼈대만 남아 삐걱거리는 고층 빌딩 사이로, 붉은 녹물이 괴어 있는 물웅덩이가 사람들의 음울한 표정을 비추곤 했다.


그 도심 한편에서는 블루 펜타곤이 바벨탑처럼 우뚝 솟아, 철회색 스모그를 뚫고 높이 치솟아 있었다. 그리고 도시의 반대편 끄트머리에 배스토니 교정시설이란 이름의 견고한 시멘트 벽이 드리워져 있었다.


산성비가 시시각각 지면을 두드리는 날이면, 이 스모그빛 대기는 더욱 탁해졌다. 무채색으로 뒤덮인 하늘과, 그 아래서 무표정하게 일상을 이어 가는 사람들의 풍경은 가끔씩 파랗게 반짝이는 드론 빛에 가려지곤 했다. 누군가는 블루 펜타곤을 올려다보며, 그 안에 모든 희망이 있다고 믿었지만, 또 누군가는 절망만이 가득 차 있다고 단념했다.


소장 프레이저와 또 다른 레플리칸트들

배스토니 교정시설 지하 격리 구역에는 이상할 정도로 무겁고 습한 공기가 감돌았다. 이곳을 전담하는 소장 프레이저(Frasier)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자, 간간이 빛나는 적색 조명등이 그의 군복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철제문을 열고 들어간 방에는, 제로(Zero)와 오리온(Orion)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한눈에 날카롭고 냉랭한 표정, 그 어둑한 눈빛 아래 몸을 굳게 세워 침묵을 지키는 레플리칸트 제로. 그는 사이먼 벨과 동일한 해킹 능력을 잠재적으로 지닌 존재다. 세상의 모든 컴퓨터를 장악할 수 있는 소름 끼치는 힘이 그의 몸속에 잠들어 있다. 그 뒤로 전투 특화형 레플리칸트 오리온. 그는 전투 AI 로봇의 근력을 극단까지 끌어올릴 수 힘을 지니고 있고, 전장 지휘 알고리즘까지 체화한, 말 그대로 ‘무적의 병사’이다.


두 레플리칸트는 캄캄한 조명 아래서 쉴 새 없는 특훈을 거듭하고 있었다. 전투 훈련 직후였는지, 오리온은 헐떡이는 숨소리를 애써 감추려 했고, 온몸은 거친 땀방울로 뒤덮여 있었다.


“힘들어 보이는군, 오리온.”


프레이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숨 막히는 화학 냄새 속에서도 태연히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 오리온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아끼는 듯하면서도 냉혹한 기운을 내비쳤다.


“아직 버틸 만합니다, 소장.”

“사이먼의 중앙 시스템을 모니터링 중이지만… 우리가 찾을 만한 특별한 계획은 아직 감지되지 않습니다.”


오리온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응답하는 사이 제로는 접속된 시스템들과 교감을 계속하는 듯, 실험실 곳곳에서 반짝이는 불빛 속에서 담담하게 프레이저가 알고 싶어 하는 정보를 말했다.


이들의 대화 사이, 철제문틈으로 독특한 기계음이 새어 들어왔다. 수십 대의 실험 장치가 교정시설 안에서 돌아가고 있었고, 곳곳에서 연구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발소리도 메아리쳤다.



레플리칸트 트리오를 향한 야망

프레이저는 계기판에서 나오던 깜빡이는 빨간 불빛을 꾹 눌러 끈 뒤,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알고 있겠지만, 조만간 마리안(Marian)도 너희와 합류할 거야. 감정 회로가 인간에 버금가고, 무엇보다… 임신 가능한 레플리칸트지.”


그 말에, 한동안 싸늘한 공기를 유지하던 방 안의 분위기가 살짝 흔들렸다. 오리온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고, 제로는 고개를 살짝 들어 프레이저를 힐끗 보았다.


“너희 둘이 마리안과 합류하면, 사이먼 벨(Simon Bell)의 독재를 끝낼 수 있는 ‘트리오’가 완성된다. … 나는 지루한 허황된 명분 따위를 믿지 않지만, 너희와 함께 세상을 새롭게 만들 의지는 있다.”


말을 마친 뒤, 프레이저는 호주머니에서 어떤 작은 금속 구슬을 꺼내 굴려 보았다. 그것은 레플리칸트 신경 칩과 닮은 물건이었지만, 푸른빛으로 빛났고 희미한 진동을 뿜었다.

“나는 이것을 마리안의 몸에 이식할 거야. 그동안 내가 수집한 사이먼에 대한 모든 정보와 함께. 그러면 너희가 지니고 있는 힘과 능력, 그리고 마리안이 가진 비범한 가능성… 이 모든 걸 합쳐서 사이먼의 독주를 잠재울 희망이 생기는 거지.”


잠깐이지만 프레이저의 눈빛이 결연했다. 오리온이 흘깃 그의 의지를 직감하는 사이 제로의 전자 파동이 모니터에 미세한 진폭을 그렸다. 같은 꿈을 꾸는 것이 분명했다. 프레이저의 묵직한 목소리엔, 그들이 함께 그리는 야망이 잿빛 불꽃처럼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 시각, 블루 펜타곤 — 은빛 장막 뒤에 숨긴 두려움

도시 중심부에서 멀리, 블루 펜타곤은 은빛 장막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 탑의 하단부가 파랗게 빛나는 연기 기둥을 뿜어내며, 주변 공간을 에워싼 드론들이 일사불란하게 비행 중이었다. 짙은 구름 사이로 내리는 붉은 산성비가 탑 외벽을 타고 흐를 때마다, 기괴한 전기 스파크가 반짝이며 주변을 잠식했다.


언뜻 보면 바벨탑처럼 위협적인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 탑이 독재자 사이먼 벨(Simon Bell)의 무자비한 권위를 상징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라곤(Aragon) 함대가 준비만 끝나면… 남은 국가들도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겠지. 새 지구를 믿지 않는 자들은, 결국 내가 펼쳐 보일 이 블루 펜타곤의 힘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탑 최상층에서 거대한 창문을 바라보는 사이먼은, 검푸른 하늘을 등지고 섰다. 붉은 비가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 사이로 복도 끝에서 참모가 급히 뛰어오자, 그는 표정을 지운 채 고개를 돌렸다.


“각하, 노바 앤젤레스 외곽에서 반군 세력이 움츠린 듯 보이긴 합니다만… 배스토니 교정시설 쪽이 심상치 않습니다. 소장 프레이저가—”


“프레이저? 충직한 인물이긴 하지. 다만, 가끔 과열된 면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난 그를 믿고 있다.”


사이먼은 차가운 미소로 말을 끊었다. 그리고 홀로그램 스크린 위로 떠오른 배스토니 교정시설의 지도를 손가락으로 툭 찍었다. 그 뒤 곧 다른 지도에 떠오른 빨간 점들을 확대해 보며, 아직 항복하지 않은 반군 세력의 동태를 유심히 살폈다.


“혹시라도 그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지 않길 바랄 뿐이다. 필요한 경우엔, 내가 직접 탑을 이동해 그곳을 조사해 볼 수도 있어. 하지만 그가 내 신뢰를 배신하진 않을 거다.”


참모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있는 일이었다. “프레이저”란 말이 나오면, 사이먼은 꼭 그 대화를 짧게 끊어 버렸다. 참모들은 그때마다 의아해했으나, 굳이 더 묻지 못했다.


그저 사이먼의 표정 너머에 스쳐 가는 복잡한 감정—누군가에게 분노와 애증이 뒤섞인 듯한, 묘한 떨림이 번지는 걸 목격했을 뿐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연결된 인연이 있다는 느낌을, 사이먼은 애써 감추려는 듯했다.


“프레이저… 예전부터 내가….”


사이먼은 무심결에 혼잣말처럼, 낮은 소리로 말하다 이내 말을 삼키고,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에는 드론 떼가 붉은 비를 가르며 사방으로 흩어져 나가고, 무너져 가는 도시의 윤곽이 희미하게 깔려 있었다.


“내게 그가 필요 없다면 굳이 그를 내 편으로 불러 둘 필요 없지…”


사이먼은 가볍게 손목을 돌려, 분주한 참모들을 내보냈다. 아직도 프레이저의 이름이 거론된다는 점이 은근히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교차되는 어둠, 그리고 감춰진 실마리

하지만 사이먼이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지나치는 배스토니 교정시설내부에선, 전혀 다른 기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제로(Zero)와 오리온(Orion)—그리고 곧 합류하게 될 마리안(Marian)을 통해 싹트는 전복의 불씨는, 사이먼이 자랑하는 블루 펜타곤조차 휩쓸어 갈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소장 프레이저는 지하 격리 구역에서 이들을 눈여겨보면서, 동시에 오래된 전쟁 기록과 ‘특별한’ DNA 샘플에 관해 생각했다.


그는 누가 봐도 사이먼에게 충직해 보이는군 지휘관이지만, 실제로는 은밀히 반역을 꿈꾸는 자였다. 아니 반역이라기보다는 사이먼의 의지가 바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사이먼의 좋아하는 무력이라는 방법을 통해서라도 그의 가치관이 되돌려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가 왜 독재 정권을 뒤엎으려는 결심을 했는지, 그리고 어째서 사이먼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는지는, 아직 누구도 분명히 모른다. 다만, 프레이저가 전쟁 중 입수했다는 ‘형제 유전자’에 관해 단서가 수면 위로 드러날 때마다, 그와 사이먼을 묘하게 이어 주는 그림자가 서서히 형체를 갖춰 가는 듯했다.

프레이저는 문득, 옛날 기밀 파일에서 발견한 한 줄의 문장을 떠올리곤 했다.


‘… 유전자 출처: S.B. … 단일 배아 분리… 형제-2 실험체…’


그는 애써 그 파일을 삭제했지만, 머릿속에서는 지워지지 않았다. 반면 사이먼 벨도, 종종 참모들이 “프레이저”란 이름만 꺼내면 묘한 반응을 보여왔다.


“내가 그를 믿는다”거나 “그가 과열되지 않길 바란다” 같은 말들은, 시종일관 담담했지만, 실제로는 감정이 얽혀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이먼과 프레이저가 서로를 철저히 ‘부하-상관’ 관계로 대하면서도, 정작 둘 다 상대에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이유는 어쩌면 같은 뿌리에 놓인 비밀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황상 그들은 유전자 상의 특별한 인연, 혹은 쌍둥이처럼 만들어진 레플리칸트의 흔적을 공유하는 듯 보였다. 그 가능성을 알 만한 이들은 혹여 한두 명 있을지 몰라도, 공식적으로 그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실이야말로, 배스토니 교정시설에서 만들어지는 레플리칸트 삼인조(제로, 오리온, 마리안)가 탄생했을 때, 누구보다 사이먼을 뒤흔드는 치명적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프레이저는 곰곰이 생각한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그가… 아니 그와 내가, 한 번도 분명히 대면하지 않은 이유. 그 소문이 돌면서도 끝내 묻힌 이유. 아마… 둘 중 누군가가 진실을 드러내면 이 세계가 뒤집힐 테지….’

제로오리온은 그런 내막을 전부 알지 못한 채, 각자 맡은 임무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두어 번은 프레이저가 보여준 ‘사이먼과 비슷한 장기 조직 표본’을 보고 충격을 받았었다. 분명 독재자와 비슷한 유전 정보를 지닌 표본이었는데, 프레이저는 서둘러 “실험 표본일 뿐”이라 얼버무렸던 기억이 있다.


사이먼은 탑을 옮겨 배스토니를 직접 확인해 볼 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곳에 직접 가면, 자신도 모르게 뭔가를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는 듯했다.


그렇기에 참모들은 늘 “프레이저” 언급을 조심했고, 사이먼도 대화를 곧잘 끊어 버렸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선에서 묘한 긴장감이 교차하는 동안, 제로오리온은 훈련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기다리는 마리안이 그들과 함께 합류하게 되는 날, 작게 타오르던 반란의 불씨가 거대한 불길로 번질 수도 있었다.


결국 사이먼과 프레이저, 두 남자의 알 듯 모를 듯 연결된 비밀이, 머지않아 지구 전체를 뒤흔들 전쟁의 열쇠가 될 것은 자명해 보였다.


배신”일까, “형제”일까.


서로가 그 정답을 피해 가듯 침묵하는 사이, 붉은 산성비는 도시 전역을 적셔 내려갔다. 가라앉는 밤 속에서, 블루 펜타곤과 배스토니 교정시설은 두 줄기 다른 어둠을 품고 미래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이 만나는 순간, 차디찬 비밀은 거대한 폭풍이 되어 모든 걸 송두리째 뒤엎을지도 모른다.



끝을 향한 도화선

프레이저가 귀 기울이는 전자음 뒤편에서, 제로의 정신적 파동이 섬세하게 요동쳤고, 오리온의 전투 알고리즘은 더욱 치열한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쏟아냈다. 둘은 아직 만나지 못한 마리안을 기다리며, 머잖아 지구 전체를 뒤흔들 거센 폭풍을 예감하고 있었다.


한편, 사이먼 벨은 창밖 붉은 비를 응시하며 마음 한편에 걸린 프레이저를 생각하고 있었다.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얼굴에는 감정을 지운 듯 보였으나, 어둠 속에서 홀로 영롱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그가 품고 있는 복잡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가 프레이저를 아낀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언제든지 그를 직접 처리할 수도 있다고 스스로 되뇌는 기묘한 모순—그 무게가 블루 펜타곤 전체에 스며들며 은색 그물망을 더욱 짙게 드리웠다.


거친 바람 속, 붉은 산성비는 도시를 무표정하게 적셔 내려가고, 두 권력—블루 펜타곤과 배스토니 교정시설—이 전혀 다른 길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 모르는 척 침묵하는 사이먼과 프레이저의 어긋난 형제 같은 인연이, 모든 전쟁의 서막에 의외의 결말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예감이, 서서히 어둠 속을 비집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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