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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0

13장 설원에서 시작된 희망

by 진동길

카시스와 로사

북방 연맹(Northern Alliance) 설원의 눈보라는 하루가 멀다 하고 몰아쳤다. 잿빛 하늘 아래, 온 땅은 하얀 빙판과 얼어붙은 기계 설비가 뒤얽혀 있었다. 그 극한 환경에서도 묵묵히 배관을 점검하던 여성이 있었다.


카시스(Kassis)—삼십 대 초반에 들어선, 눈매가 날카롭고 어딘가 찬바람을 닮은 표정을 짓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방사능과 화학 오염을 견딜 수 있는 특수 장비”를 직접 만들어 왔고, 이 혹독한 설원에서 살아남은 경험 덕분에 다른 레지스탕스들에게 필수 물자를 공급하는 생존 전문가였다.


카시스는 레플리칸트가 아니었다. 다만, 인간이 버티기 어려운 설원의 환경에서 지구력을 키우고, 방사능 중력 필터 시설까지 직접 수리할 수 있을 만큼 단련된 몸을 가졌을 뿐이었다. 이날도 그녀는 중무장한 채 배관을 살피고 있었다. 차가운 배관에 손을 대면 금세 손끝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지만, 카시스는 익숙하다는 듯이 태연히 작업을 이어 갔다.


(‘이 배관이 또 얼어붙기 전에 보수해야 해….’)


그런데 어디선가 스노모바일 엔진음이 들려왔다. 이 폭풍 속에 타인을 맞닥뜨리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카시스는 순간적으로 얼음 더미 뒤에 몸을 숨기며, 허리춤의 소형 권총을 쥐었다. 혹시 정부군 정찰병이 나타난 건 아닌지 긴장감이 엄습했다.


엔진음이 가까워지자, 눈보라를 가르며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죽 재킷에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온몸이 추위에 떨려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낯익은 얼굴이었다. 로사(Rosa)—유럽 연맹(European Federation)에서 온 외교·정보 수집 담당여성. 스물일곱쯤 되어 보이는 그녀는 빠른 숨을 내쉬며 스노모바일 시동을 끄고, 손을 흔들었다.


“하… 안녕, 카시스. 연락 끊겨서 걱정했어. 이 설원까지 올 줄은 나도 몰랐지…”



카시스는 하얀 고글을 살짝 들어 올려 로사의 얼굴을 확인했다. 로사가 내민 신분증을 한 차례 살피고 나서야, 카시스는 겨우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린 채, 마치 반가움과 경계를 동시에 내비치듯 물었다.


“…심상치 않다니, 무슨 얘기야? 요즘 통신이 먹통이라 난 아무것도 몰랐는데.”


두 사람은 낯선 사이가 아니었다. FAWN(Faint Aurora World Net)라는 비밀 네트워크를 통해 이미 몇 차례 짧게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북방 연맹과 유럽 연맹은 사이먼 벨의 독재를 견제하기 위해 은밀히 협력하고 있었는데, 최근 북방 연맹 설원 기지에 통신 장애가 계속돼 FAWN 접속이 끊기고 만 것이었다.


로사는 곧장 휴대 터미널을 꺼내 보여 주었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에 화면이 흔들렸지만, 미리 설치해 둔 암호화 애플릿이 구동되면서 FAWN의 긴급 메시지가 떠올랐다. 거기엔 “사이먼 벨이 곧 아라곤(Aragon) 함대를 전 지구적으로 투입할 예정이다”라는 경고와 함께, “사도단(Apostles)을 결성하라”는 문구가 번쩍이고 있었다.


카시스는 창백한 표정으로 로사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이 말인즉, 우리 북방 연맹도 곧 뚫릴 수 있다는 얘기네. 한동안은 설원의 극한이 우리를 지켜줄 거라 믿었는데… 마냥 안심할 순 없겠군.”


눈보라가 더욱 거세져, 스노모바일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도 로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협력해야 해. 유럽 연맹에서 군사·정보 지원을 이끌어낼 거야. 네가 설원에서 쓰는 특수 장비 기술을 나눠 준다면, 우리 레지스탕스가 한층 안정적으로 싸울 기반을 확보할 수 있어.”


카시스는 엷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여기서 손 놓고 기다릴 순 없으니.” 폭풍이 심해져 두 사람은 재빨리 설원 기지의 안쪽으로 향했다. 낡은 콘크리트 벽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어둑한 조명 아래 임시 중계소를 재설치하기 시작했다. 잔해를 치우고, 묵직한 발전 설비를 살려 전력을 돌리는 일은 카시스가 주도했으며, 로사는 코드를 연결해 FAWN에 접속을 시도했다.


마침내 기기가 켜지자, 그들은 FAWN으로부터 새로운 ‘집결 지점’과 사도단 구성에 관한 세부 정보를 전송받았다. 초록빛으로 춤추는 문장들이 떠오르면서,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로사가 먼저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입술을 열었다.


“새벽쯤이면 눈이 좀 잦아들 거야. 그때 기지를 떠나자. 세계가 어두울수록, 이 설원의 한가운데서라도 불씨를 지펴야 한다고… FAWN도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


“그래. 이곳이 마지막 보루일진 몰라도, 싸우기 전엔 포기 못 해. 어서 준비를 서두르자.”


바깥에선 여전히 희뿌연 눈보라가 머리를 어지럽히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빨간 경고등이 깜빡이는 동굴 같은 기지 안에서, 카시스와 로사는 두꺼운 장갑을 낀 손으로 서로 꽉 악수를 나눴다. 이 설원에 또 얼마만큼의 폭풍이 들이닥칠지 몰랐지만, 그들은 “사이먼 벨”이라는 거대한 적 앞에서, 작은 연대의 불씨를 지피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곧 “사도단(Apostles)”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또 다른 혁명의 서막이 될 터였다.


(폭풍이 머지않아 잦아들 무렵, 두 여성은 다시 스노모바일과 설비를 점검하며 레지스탕스 본부로 향할 채비를 꾸렸다. 거세게 몰아치는 눈보라 한가운데에서도, 희망이라는 불씨가 어슴푸레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불씨가 전 세계에 번져 갈 수 있을지, 이제 그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희미한 희망, 시작된 사도단

카시스와 로사는 이제 함께 FAWN이 지시한 장소를 향해 움직일 것이다. 만약 이들이 일으키는 작은 동맹이 성공한다면, 북방 연맹과 유럽 연맹은 한 단계 강력한 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배스토니 교정시설에서의 움직임(마리안·제로·오리온·미리암)까지 더해지면, “사도단(Apostles)”이라는 거대한 전 지구적 반체제 연대가 실현될지도 몰랐다.


(설원 기지의 조명들이 하나둘 꺼지고, 여명 직전 어스름한 하늘에 회색 눈보라가 일렁이는 가운데, 카시스와 로사는 두꺼운 외투에 마스크를 쓰고 밖으로 나갔다. 스노모바일 시동이 울리는 가운데, 둘의 모습이 눈보라 속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파란만장한 여정의 시작—노바 앤젤레스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설원의 외딴 기지에서부터, 사이먼 벨에 맞서기 위한 불씨가 다시 타오르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FAWN이 전하는 최후의 메시지에 따라, 사도단이 모든 절망을 뒤엎고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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