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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줍는 아이

7장. 이름을 부르는 악사(樂師)

by 진동길


별을 줍는 아이는 순례자와의 침묵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바람은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지나갔고,

주머니 속 별 조각들은 이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빛을 머금고 흔들렸다.


침묵 속에서 발견한 고요가 여운처럼 남아, 아이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누군가의 무언(無言)의 노래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낯선 선율

얼마나 더 걸었을까.
저 멀리서 가느다란 선율이 실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흔히 듣는 악기의 소리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낯섦과 익숙함이 동시에 감도는, 묘한 울림이었다.
문득 아이는 호기심을 느끼며 소리를 따라 발길을 옮겼다.


잔디가 우거진 들판 한가운데, 허름한 돌계단에 한 악사가 앉아 있었다.
그는 낡은 현악기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잔잔한 미소와 함께 손가락으로 줄을 살짝 누르자
공기 중에 맑고도 아릿한 멜로디가 흩어졌다.
아이를 발견하자, 악사는 흘끗 고개를 들어 부드러운 눈빛으로 인사를 건넸다.


“오래 기다렸다, 별을 줍는 아이.”


아이의 마음이 떨렸다.
자신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이들이 늘 그렇듯,
악사의 목소리에는 따뜻함이 깃들어 있었다.



노래의 정체

“혹시… 방금 들리는 그 음악, 무슨 곡인가요?”
아이가 조심스럽게 묻자, 악사는 눈을 감고 대답했다.


“이건 ‘이름을 부르는 노래’야.
아직 기억나지 않는 네 이름을, 네가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선율이란다.”


아이의 가슴이 울컥해졌다.
그간 여정을 거치며 배웠던 수많은 가르침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이름, 즉 존재의 깊은 부름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아이의 눈이 흔들리는 걸 본 악사는, 조용히 악기의 줄을 튕겼다.
그 공명은 마치 아이 안에 잠들어 있는 목소리를 일깨우듯 진동했다.


“정말… 제가 누군지 알 수 있나요?”
작은 목소리로 아이가 물었다.

악사는 가만히 웃으며 손끝으로 줄을 고쳐 매만졌다.


“네 이름은 이미 네 안에 있단다.
다만, 그것을 부르고 싶은 용기가 필요하지.
두려움이 있으면 목소리는 쉽게 막히고,
말 못 한 진실들은 늘 음영처럼 숨어버리거든.”


아이의 눈동자에서 주저함이 살짝 묻어났다.
그러나 그는 이미 ‘진실을 적는 서기’에게 자신의 마음을 적어본 적이 있었고,
‘용서를 심는 수도자’, ‘슬픔에 물을 주는 정원사’, ‘시간을 바느질하는 시계장수’,
그리고 침묵의 순례자를 거쳐 오며 어느새 조금씩 “자신을 향한 길”로 다가가고 있었다.




별 조각이 만드는 화음

아이의 주머니 안에서 별 조각들이 설렘 섞인 빛을 일으키자,
악사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네 별 조각이 서로 소리를 내고 있구나.
아마 서로를 ‘찾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


악사의 말처럼, 각기 다른 모양과 크기로 부서진 별 조각들은
서로가 부딪혀 맑은 초음(超音)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음악이라기엔 너무 은은했고,
침묵이라기엔 너무 분명하게 귀에 들렸다.


“이 조각들이 모이면, 별은 다시 완전해질까요?”
아이가 무심코 내뱉은 질문에, 악사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별이 완전해지는 건 ‘조각을 이어 붙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아.
오히려 중요한 건, 그 조각들로 무엇을 노래할 거냐 하는 거란다.”


아이의 시선이 흐려졌다.
별이란 단지 하늘에 반짝이는 빛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이자 기도, 슬픔과 용서, 그리고 진실…
그 모든 것이 ‘노래처럼 울려야 할 무엇’이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깊은 공명

악사는 악기를 살짝 조율하더니,
아이에게 손짓으로 가까이 오라고 했다.


“자, 내 곁에 앉아서 네 마음에 있는 음을 뱉어보렴.
거창할 필요 없어. 그냥 지금 네 속에서 제일 간절한 소리를 내면 돼.”


아이는 잠시 망설였지만,
지난 여정을 떠올리며 두려움을 누르고 입술을 열었다.


처음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작은 떨림이
서서히 혀끝에 맺히더니, 아주 낮은 음으로 흘러나왔다.


악사는 그 음에 맞춰 줄을 튕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안정되고 힘을 얻었다.
가슴속에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소리의 파동을 타고 흘러나오는 기분이었다.


그때, 주머니 속 별 조각들이 맑은 화음으로 함께 진동했다.
마치 자기들도 오래 기다려온 노래에 응답하듯,
서로 다른 빛들이 겹쳐지는 순간,
아이의 마음 안에 한 단어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것은 ‘나’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자,
영원 전부터 그를 향해 있던 부름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아직 그것을 입 밖에 낼 준비가 되지 않은 듯,
목소리를 멈추고 악사를 바라보았다.

악사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줄을 멈췄다.


“괜찮아. 지금은 그 이름을 완전히 말하지 않아도 돼.
대신, 잊지 않고 가슴에 품고 있으면 언젠가 자연스레 입 밖으로 나올 거야.
네 별이 완성될 때쯤, 그 이름은 더 이상 ‘숨겨진 단어’가 아니게 될 테니까.”




이름을 부르는 노래

이윽고 악사는 아이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별을 줍는다는 건 결국, 네가 네 존재를 온전하게 부르는 연습을 하는 거야.
부서지고 깨어진 순간을 부정하지 않고,
그 속에서 우러나는 노래를 찾는 것…
그것이 ‘네 이름’을 찾는 길이란다.”


아이는 눈을 감았다.
마음 한구석에서 막 태어난 듯한 그 이름이
아직 완전히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제는 언젠가 소리 내어 부를 수 있으리라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별 조각들은 어느새 섬세한 빛의 선율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빛은 아이의 손바닥, 가슴, 그리고 머릿속 작은 세계 곳곳을 비추며
어디론가 길을 안내하는 듯했다.


“고마워요,”
아이는 악사에게 조용히 인사를 건네고,
낡은 돌계단에서 일어섰다.


악사는 여전히 미소 지으며 낯선 선율을 이어갔다.
그 소리는 깊은 밤하늘의 별빛처럼,
아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비추어주었다.




새로운 여정의 예감

다시 길을 나서는 아이의 발걸음은 한층 가벼웠다.
이름 모를 불안과 외로움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그 감정조차 언젠가 내 노래가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시간을 꿰매주던 시계장수의 바늘

슬픔을 키우던 정원사의 눈물

용서를 심던 수도자의 메마른 땅

진실을 적던 서기의 투명한 잉크

침묵을 걷던 순례자의 고요

그리고 악사가 들려준 이름을 부르는 노래


이 모든 만남이 별이 부서져 비추는 또 하나의 빛이 되어,
아이를 더 먼 곳, 아직 알 수 없는 미래로 이끌고 있었다.
아이의 주머니 속 별 조각들은 이제 더는 단순한 ‘파편’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언젠가 아이가 크게 외칠 자신의 이름이 서서히 빛을 머금고 있었다.


“별은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먼저 부르는 법을 배워야 해.”


문득 아주 오래전 누군가가 들려준 말이
한층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이번에는 ‘주는 법’이 아니라 ‘부르는 법’.
아이는 그 단어를 되새기며,
다시금 발걸음을 뗐다.


그가 걸어가는 길 저편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또 하나의 별이 보였다.
아직 다가가 보진 않았지만,
이제는 그 별이 무엇을 말해줄지
두렵기보단 기대가 되었다.




그렇게, 별을 줍는 아이의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불리지 않았던 자신의 이름을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그 발걸음 속엔,
용기와 진실, 슬픔과 용서, 침묵과 노래가
어우러진 작은 우주가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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