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0

15장 FAWN의 봉화는 이제 대지를 가르기 시작했다

by 진동길


FAWN(Faint Aurora World Net)의 메시지는 공기보다 조용했고, 전쟁보다 무거웠다. 그것은 총성도, 함성도 아닌 숨결 같은 울림이었다. 하지만 그 울림은, 설원의 칼바람을 가르고, 사막의 열기를 뚫고, 거대한 대륙을 건너, 전 세계의 숨죽인 저항 거점들로 파고들었다. 북방 연맹의 설원, 희뿌연 눈 속에서 카시스로사가 맞잡은 손. 아프리카의 모래폭풍 한가운데, 태양처럼 타오르는 다리우스와 바닷물에 젖은 수리야의 결의.


그들과 같은 시간, 또 다른 하늘 아래, 또 다른 시간대, 수신기 안으로 느릿하게 스며든 그 목소리가, 전선을 지키던 전사들의 심장을 건드렸다. 그들은 각기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어떤 이는 사람을 구했고, 어떤 이는 무기를 만들었으며, 어떤 이는 데이터를 수호했고, 어떤 이는 복수를 품었다. 그러나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절망을 버티고 있었고, 그 목소리는 그 절망의 틈을 비집고 속삭였다.


“이제, 흩어진 희망들을 하나로 모을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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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지휘관들의 각성 — 케인, 헤수스, 라일락, 룩


서막: 전 세계로 퍼진 전쟁의 그림자

전 지구적 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사이먼 벨(Simon Bell)이 이끄는 독재 정권은 각 대륙에 대한 무력 진압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FAWN”이라는 분산 네트워크가 곳곳에서 레지스탕스 세력을 결집시키고 있었지만, 드론 공습과 정보 차단 정책으로 인해 이미 수많은 전선이 무너진 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흩어져 있던 몇몇 인물들은 아직 완전히 꺾이지 않은 희망을 품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의 발걸음은 머지않아 ‘사도단(Apostles)’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모이게 될 운명이었다.




유럽의 잿빛 전선에서 — 케인의 후회와 결단

지중해 연안의 고지대, 사방이 포연으로 뒤덮인 잿빛 전장 한가운데서 거대한 성채의 돌담이 폭격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 파편과 먼지는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치솟았고, 부상자를 구출하려는 병사들이 아비규환 속에서 오가고 있었다. 그 혼돈의 한가운데, 피로 얼룩진 군복에 숨을 헐떡이며 서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케인(Kaine), 35세의 전직 유럽 연맹(European Federation) 장교다.


원래 그는 사이먼 벨의 군사 노선에 충성하는 장교였으나, 권력층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을 직접 목격한 뒤 탈영을 감행했다. 이후 스파이망을 무력화하고 반체제 지하군에 합류, 유럽 연맹 반군의 핵심 전략가가 되었지만, 그의 손으로 설계한 방어선이 이날 무참히 붕괴되고 말았다.


파손된 FAWN 단말기에서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메시지는 더욱 큰 결단을 재촉한다.

“FAWN 전역에 경고가 전파되었다. 사이먼 벨이 아라곤 함대를 동원해 전 지구적 공세를 시작한다.

사도단을 결성해라.

집결 좌표는 암호화되어 있다. FAWN이 그것을 안내할 것이다.”


케인은 주저하지 않았다. 직접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전사들에게 외치듯 결심을 드러냈다.

“더 늦기 전에, 국제 동맹을 만들어야 한다. FAWN을 따라 ‘그 장소’로 간다.”


하지만 내부 스파이의 배신으로 기지는 곧 드론 부대의 추가 포격을 받고, 돌담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케인은 불길과 잿더미 속에서도 최대한 많은 병사들을 안전지대로 먼저 대피시킨 뒤, 홀로 최후의 탈출로를 향해 달렸다.


‘이 전쟁을 끝낼 방법이 있다면, 난 반드시 그 길을 택하겠다’는 그의 다짐은 이미 마음속에서 확고해져 있었다.




라틴의 지하에서 — 헤수스의 그림자 연결망

케인이 떠난 바로 그 시각,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라틴 아메리카 연합(Latin Confederation) 지하 망에서는 또 다른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파괴된 공장 창고를 개조한 은신처 안. 무기 상자와 드론 부품이 가득 쌓인 공간에서 민첩한 손놀림으로 물자를 정리하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헤수스(Jesus), 33세로 라틴 아메리카 지하 밀매망을 실질적으로 주무르는 인물이다.


반독재 세력에 의약품과 무기를 공급해 온 그를 사람들은 가볍게 ‘유쾌한 밀수꾼’이라고 부르지만, 막후에는 ‘FAWN 네트워크’와 긴밀히 연결된 숨은 거점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 최근 들어 사이먼 벨이 라틴 아메리카 일대에 검문과 게릴라 소탕 작전을 강화하기 시작하자, 헤수스는 드디어 결단을 내린다.


“검문 강화, 정부군 투입, 게릴라 체포 작전… 사이먼 벨이 조급해졌군. 이 정도면 슬슬 반격할 때가 됐지.”


라틴식 억양으로 휘파람을 불던 그에게, 곧바로 케인이 유럽에서 부상당한 채 탈출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손쓸 틈을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긴박한 상황. 헤수스는 곧바로 무기 상자 덮개를 닫고 지하터널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관리하는 무허가 드론 운송 경로는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관통하며, 동시에 전 세계 각지와 비밀리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이 경로를 열어, 케인이 필요로 하는 장비와 통신기를 즉시 지원하기로 한다.


은신처의 깊은 지하로 내려가는 발걸음에는 이미 ‘사도단 결성’에 대한 희미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동아시아의 하늘 아래 — 라일락의 코드 전쟁

같은 시각, 지구의 반대편인 동아시아 융합도시 지하 8층. 해커들의 은밀한 벙커에서 한 소녀가 세 개의 키보드를 동시에 두드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일렁이는 전광판처럼 바삐 움직이는 그녀는 라일락(Lilac), 25세의 천재 해커다.


사이먼 벨 정보국은 그녀를 “불안 요소 1순위”로 지정했을 만큼 경계하고 있었다. 실제로 최근 벨 측이 아시아 해킹망을 강제 장악하려 했으나, 라일락은 홀로 이를 철저히 저지해 냈다. 그녀는 FAWN 동아시아 분산 서버의 마지막 관리자로서, 얼마 전부터 ‘제로(Zero)’라는 미지의 인물과 교신하고 있었다.


제로(음성 채널, 낮고 담담한 톤): “블루 펜타곤의 제3 보조망을 해제해 두었어. 네가 시간을 벌어준다면, 내가 나머지를 끄집어낼 수 있다.”


라일락(속삭이듯): “내가 이걸 막아낸다면 아시아 전체가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겠지. 좋아… 해킹 전쟁, 시작하자.”


곧 라일락은 FAWN으로부터 ‘사도단(Apostles) 결성’에 대한 긴급 정보를 수신한다. 더 이상 망설일 여유는 없다.


그녀는 재빨리 드론 컨트롤 칩을 챙기고, 극비로 확보해 둔 도시 외곽의 이동 경로를 통해 벙커 밖으로 나아갔다. 사이먼 벨의 디지털 감시망이 동아시아 전역을 뒤덮고 있었지만, 이미 라일락의 손엔 FAWN이 암호화해 둔 집결 좌표가 들려 있었다.





미국 프리존의 뒷골목 — 룩의 맹세

한때 번화했던 미국 남부의 대도시는 이제 프리존(Free Zone)이라 불리며 폐허가 되었다. 길거리마다 붉은 낙서와 반정부 구호가 어지럽게 뒤섞인 곳, 그중 부서진 쇼핑몰 지하에는 작은 진료소가 문턱 하나로 겨우 유지되고 있었다.


거기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사람들의 상처를 꿰매주던 젊은 청년은 룩(Luke), 28세의 생체의학 전문가였다. 폭격으로 인해 자신이 운영하던 야전 병원이 폐허가 되고, 가족과 동료마저 잃은 뒤, 그는 더 이상 의료 활동만으로는 이 지옥 같은 현실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얼마 전 FAWN 네트워크로부터 ‘사도단 결성’ 소식이 전해졌을 때, 룩은 조용히 의료 가방을 챙기면서도 마음속에 복수를 향한 의지를 굳혔다.


“이젠 메스를 내려놓고, 이 기술을 무기처럼 쓸 때가 왔군.”


그는 지하 통로를 통해 프리존 외곽으로 나아갔다. 그가 목적지로 삼은 곳은 “래그나로크 터미널(Ragnarok Terminal)”. 전 세계로 번져 가는 이 거대한 전쟁의 새로운 격전지로, 룩은 이미 스스로를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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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 향하는 길

그렇게 세계 곳곳에서 움직이던 네 사람, 케인· 헤수스· 라일락· 은 서로 다른 환경에 놓여 있었음에도, 하나의 이름 아래 점차 연결되고 있었다.


케인은 동유럽 국경을 넘으며 피난민 호송차를 통해 라일락과 통신을 연결하고, 헤수스는 룩에게 필요한 의약품과 무기를 드론 경로로 전달했다. 라일락은 FAWN 메인 서버의 잠금을 풀어 전 세계 반군 세력이 동시에 접속할 수 있도록 통로를 확보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도단(Apostles)’이라 불리게 될 네 명의 전사들은 수많은 위험과 감시를 뚫고 래그나로크 터미널로 모이기 시작한다. 사이먼 벨의 감시 드론이 하늘을 뒤덮고, 각 전선이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도, 서로를 향한 도움의 손길과 연대의 끈은 점점 견고해져 갔다. 아직 이들은 얼굴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지만, 이미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걷는 동지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뒤를 따르는 이름 없는 전사들 사이에서는 작은 불씨 같은 희망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바야흐로, 사도단의 봉화가 전 세계적으로 찬란하게 타오를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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