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침묵을 걷는 순례자
별을 줍는 아이는 “진실을 적는 서기”의 집을 떠난 후,
자신의 마음속에서 아득히 울리던 어떤 기척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 조용히 불러주는 듯한데, 소리가 아니라 침묵으로 들려오는 느낌이었다.
그는 별 조각들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조각들은 조금씩 이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어느 별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이전과는 달리 그 불완전함이 두렵지 않았다.
마치 “조각조각 이어지는 과정 자체”가 소중하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은 듯했다.
그렇게 한없이 걸어가던 어느 날,
아이는 탁 트인 초원 위에 높고 긴 사암 기둥 한 개를 발견했다.
기둥 정상에는 깃발도 표지판도 없었지만,
어딘지 영적(靈的)인 기운이 감돌았다.
기둥 옆으로 다가가자, 회색 옷자락을 두른 사람이 보였다.
머리에는 모자를 깊이 눌러써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람은 무언가를 바라보거나 듣는 듯, 한없이 고요한 자세로 서 있었다.
아이의 발걸음 소리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이는 가만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별을 줍는 아이예요.”
하지만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잠시 맑은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더니,
손짓으로 이쪽으로 오라고 부드럽게 신호를 보냈다.
아이는 약간 긴장되었지만, 동시에 궁금증이 일었다.
‘말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
언젠가 ‘슬픔을 물 주는 정원사’가 그랬던 것처럼,
이미 자신을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 느껴졌다.
그 무언(無言)의 이끄심을 따라 기둥 뒤편으로 돌아가 보니,
좁고 험한 오솔길이 이어져 있었다.
마을의 소음이나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마치 침묵으로 둘러싸인 길 같았다.
둘은 그 길을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아이와 순례자 사이에는 대화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잠깐이라도 말하지 않고 걸으니
마음속에서 생기는 작은 소리들이 더욱 뚜렷하게 들려왔다.
‘나는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고 싶은 걸까?
아니면 모르고 있는 지금이 오히려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이의 내면에서 이런 질문들이 피어올랐고,
그때마다 주머니 속 별 조각들이 조용히 흔들렸다.
침묵은 아무 대답을 주지 않았지만,
오히려 대답을 “스스로 찾아보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한참을 걷다 보니, 오솔길 끝자락에
무너진 채로 남아 있는 작은 성소(聖所) 같은 폐허가 나타났다.
벽은 대부분 부서져 있었고, 천장도 무너져 내린 흔적이 보였다.
하지만 공간 한가운데에는 낡은 십자가 모양의 기둥이 서 있었고,
그곳에 다다르자 순례자가 가만히 멈춰 섰다.
그리고 작은 종 하나를 꺼내더니, 맑은 소리를 울렸다.
종소리는 그 폐허 전체에 퍼져나갔고,
놀랍게도 아이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신 안의 침묵과 맞닿는 특별한 감각을 느꼈다.
여전히 순례자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이의 머릿속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문장이 떠올랐다.
“침묵은 말을 잃은 것이 아니라,
‘말을 뛰어넘은 진실’을 듣기 위한 언어이다.”
문득, 아이 스스로 그 문장을 생각해 낸 것인지,
아니면 순례자가 침묵 속에 들려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순간, 어쩐지 두려움도 의심도 가라앉았다.
오랜 시간 폐허 안에 서 있자,
아이는 마음속 깊이 숨겨 놓았던 작은 갈망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다”는 바람이기도 했고,
“정말로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의문이기도 했다.
아이의 눈가에 뜨거운 무언가가 맺혔다.
그는 슬픔인지 안도인지 모를 감정에 복받쳐,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저… 사실은, 너무 외로운 것 같아요.”
그 순간, 오랫동안 입을 떼지 않았던 순례자가
처음으로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서… 나도 이렇게 침묵 속을 걸어왔단다.”
그 말 한마디에, 아이는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이해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더 이상 참지 않았다.
흘러내리는 눈물은 폐허의 바닥을 적셨고,
그 흐름 속에서 별 조각들도 맑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순례자는 아이에게 조그만 돌 한 조각을 건넸다.
평범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작은 꽃이나 별처럼,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는 형상이었다.
“이 돌은, 내가 걸어온 모든 시간의 ‘침묵’이 깃든 거란다.
말하지 않아도 네 안에 있는 ‘진짜 소리’를 들으려면,
때로는 세상의 소리를 끄고, 이렇게 침묵을 걷는 법을 배워야 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이의 머릿속에는
그간 만났던 시계장수, 정원사, 수도자, 서기와의 대화들이
마치 한 편의 작은 교향곡처럼 울려 퍼졌다.
그 모든 소리가 어우러져 “나”라는 존재를 부르고 있었다.
아이는 순례자를 향해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돌을 꼭 쥐고, 별 조각들이 들어 있는 주머니에 조심스레 넣었다.
순례자는 다시 입을 닫았지만, 아이는 충분히 이해했다.
침묵이란, 모든 소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소리를 듣기 위한 준비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