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진실을 적는 서기
별을 줍는 아이는 용서를 심는 수도자에게서 배운 뒤,
오랫동안 제 발걸음을 돌이켜 보지 않고 걸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낡은 후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결심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아직 바보처럼 용서되지 못한 자기 자신을 보기가 두려웠던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며칠째 길을 걷던 어느 날, 아이의 앞에 아무 특징 없는 작은 건물이 나타났다. 창문은 보이지 않았고, 문도 닫혀 있었다. 하지만 바로 옆에 조그만 간판이 걸려 있었다.
「진실을 적는 서기의 집」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사실, 여기로 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투명한 책상, 끝없는 종이
안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넓은 방이 펼쳐져 있었다.
방 한가운데는 마치 빛으로 만들어진 듯한 투명한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종이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잉크 단지와 깃펜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잉크는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책상 뒤에 앉아 있던 이는 나이가 가늠되지 않는 얼굴을 한 서기(書記)였다. 머리카락도, 눈빛도 온통 은은한 빛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에 펜을 살짝 쥐고, 이미 뭔가를 적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저는 **‘진실을 적는 서기’**입니다.
이 책상은 오직 진실만 받아 적을 수 있는 곳이랍니다.”
아이의 눈이 커졌다.
“진실…이라고 하면, 좋은 것만 적는 건가요?”
서기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요, 진실 중엔 쓰라리고 불편한 것도 많아요.
하지만 진실이란, 있는 그대로를 의미하기에
그 어떤 감정이 섞여도 왜곡되지 않아요.
거짓말이나 착각은 여기에 적히지 못하죠.”
그제야 아이는 주머니 속 별 조각들이 아주 미세하게 부서지는 소리를 내고 있음을 느꼈다. 무언가, 자신 안에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과거 혹은 상처가 진실의 빛 앞에서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이의 고백
“저… 사실은요,”
아이는 머뭇거리며 꺼내 놓았다.
“저는 용서도 배우고, 슬픔을 돌보는 법도 배웠지만,
여전히 제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심지어… 제 별 조각들이 어느 순간부터
점점 빛이 희미해진 것 같아요.”
서기는 조용히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은은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당신이 ‘진실하게’ 적을 수 있는 말을 먼저 해보시겠어요?
가령, ‘나는 나 자신이 낯설다’,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조차 잊었지만, 여전히 죄책감을 느낀다’,
혹은 ‘사실은 무언가를 두려워한다’ 같은 고백들 말이죠.”
그 말에 아이는 쑥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공간에선 거짓말로 자기를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조용히, 깃펜을 잡았다.
투명한 잉크를 찍어 종이 위에 천천히 적어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 두렵다.
그래서 때때로, 나 자신이 잘못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사실은, 내가 왜 이런 마음을 가지는지도, 잘 모르겠다.”
펜 끝에서 적힌 문장은 누런 잉크도, 검은 잉크도 아니라, 맑은 물빛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아이의 손이 떨리고, 종이가 흔들렸지만, 그 글자들은 점점 또렷해졌다.
문장을 적을수록 아이의 가슴 어딘가에서 막혔던 것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듯했다. 주머니 속 별 조각들이 아주 살짝 빛을 되찾았다.
서기의 역할
서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진실은 늘 우리 안에 있었죠. 다만, 외면하거나 무서워해서 만나지 못했을 뿐이랍니다. 진실을 적는다는 건, 곧 스스로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행위예요. 그리고 그 순간부터, 거짓된 어둠은 힘을 잃기 시작하죠.”
아이는 서기의 말에 눈을 감았다.
자신을 괴롭히던 불분명한 공포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종이 위에 더 많이 적어볼래요.
제가 잊었던 상처들, 부끄럽게 느껴졌던 감정들,
그리고… 혹시 제가 누군가에게 했을지도 모르는 상처까지요.”
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넘겨주는 종이는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진실은 어두운 방에 켠 작은 등불처럼
아이는 한참을 적었다.
당장은 전부 기억나지 않지만,
글로 표현되는 한 줄 한 줄마다
마음 어딘가에서 작은 별 조각들이 서로 이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쓰라린 기억도, 아직 다 풀리지 않은 의문도,
투명한 잉크로 써 내려갈 때마다
아이의 별 조각들이 공명하는 듯 부딪혔다.
어쩌면, 아이가 떨어졌던 그 ‘별’은
이런 고백을 위해 부서졌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이의 손끝은 떨렸지만, 마음만은 훨씬 가벼워졌다.
종이 끝을 말아 올리던 순간, 서기가 차분히 말했다.
“이제, 당신의 진실은 더 이상 숨겨져 있지 않아요. 그것은 당신의 것이면서도, 동시에 이제 세상에도 속해 있죠. 왜냐하면 진실은 빛을 볼 때 비로소 완성되거든요.”
아이는 서기의 말을 음미했다.
그리고 아주 작게, 하지만 분명하게 미소 지었다.
“제 별이… 조금씩 이어지고 있어요.
아직 완전하지 않지만, 뭔가 달라졌어요.”
서기는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럼 이제, 새 길을 걸어가세요.
더 적고 싶다면 언제든 다시 오시면 됩니다.
당신의 진실은 당신이 직면하려는 의지가 있는 한,
절대 도망가지 않으니까요.”
그 말과 함께 아이는 조용히 문 밖으로 나왔다.
맑은 공기가 아이의 폐 속으로 깊이 들어왔다.
주머니 안 별 조각들은 한결 가벼워진 듯했고,
먼 곳에서 무언가가 아이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