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용서를 심는 수도자
별을 줍는 아이는 한동안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바람은 말이 없었고, 길은 목적 없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이 잠시 그를 피해 가듯 고요해졌지만,
그 사이에도 아이의 주머니에는 조금씩 더 많은 별 조각이 쌓여 갔다.
어느 날, 그가 걸어 올라간 언덕 너머에는
돌과 모래만이 가득한 메마른 땅이 나타났다.
풀 한 포기조차 살지 못할 것 같은 그곳 한가운데서,
낡은 수도복을 입은 사내가 삽질을 하고 있었다.
수도자의 모습은 기묘했다.
씨앗도 없고 물도 없는 땅에, 하루 종일 묵묵히 삽을 꽂았다 뺐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탁탁— 땅을 파는 소리는 차갑고 거칠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수도자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여기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땅 아닌가요?
그런 곳에 대체 뭘 심으시려는 거예요?”
수도자는 삽질을 멈추지 않은 채로,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용서는, 자라지 않는 땅부터 심어야 하거든.
이미 사랑이 있는 곳에 용서를 심을 필요는 없으니까.”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용서요…?”
그 말은 어딘가 낯설면서도, 가슴 밑바닥에 오래 깔린 먼지를 툭 털어내는 듯했다.
“그래, 용서.
사람들은 대개 용서를 ‘잊는 것’으로 착각하곤 하지.
사실 진짜 용서는, 기억하면서도 다시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거란다.”
아이의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졌다.
주머니 속 별 조각들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진동은 언젠가 자신이 누군가를— 어쩌면 스스로를— 미워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억을 깨우는 듯했다.
“그럼, 저도 뭔가를 심을 수 있을까요?”
아이가 무심코 그렇게 묻자,
수도자는 삽을 내려놓고 아이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물론이지. 용서는 누구에게나 허락된 씨앗이야.
다만 그 씨앗을 심고 가꾸는 수고는 네 몫이겠지.”
아이는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인 얼굴로 삽을 받아 들었다.
메마른 땅은 예상보다 훨씬 단단하고, 더딘 흙먼지가 뿜어져 나왔다.
파헤쳐진 땅속에서는 잊힌 상처와 두려움, 죄책감들이
목소리 없는 비명처럼 아이의 가슴을 후볐다.
어디서부터 용서를 시작해야 할까?
어쩌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존재’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수도자는 침묵 속에서도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몇 마디를 보탰다.
“용서는, 결국 ‘용기’를 심는 일이기도 해.
잊으려 애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길이지만,
그 길 끝에는 새로운 사랑이 자라나곤 한단다.
네가 자랄 때, 그 씨앗도 함께 자랄 거야.”
한참 뒤, 아이는 땅을 조금 파낸 자리에
자신의 마음속 가장 무거운 그림자를 내려놓았다.
정확히 어떤 상처였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아도 돼’라는 기도를 함께 묻었다.
그리고는, 수도자에게서 받은 작은 씨앗을
그 옆에 조심스럽게 심었다.
땅이 워낙 메말라 금방 무너져 내렸지만,
아이의 눈길은 애틋하게 그 자리를 지켜봤다.
마치 그곳에 보이지 않는 싹이 이미 자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마워요. 그럼 이다음엔 어떻게 해야 해요?”
아이가 물었다.
수도자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기다려야지.
기다리고, 계속 스스로에게 말해줘야 해.
‘나는 기억하되, 다시 사랑하기로 결정했다’고.”
그러자 아이의 주머니 속 별 조각들이
한결 가벼워진 듯 부드럽게 흔들렸다.
아이의 눈엔, 보이지 않는 새싹이 이미 자라기 시작한 것처럼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