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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줍는 아이

8장. 마음을 밝히는 등불지기

by 진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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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줍는 아이는 악사와의 짧은 만남 뒤, 한동안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를 걸었다.
노을이 사그라질수록 밤의 어둠은 깊어졌지만,
이제는 어둠을 두려워하기보다 무엇을 볼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아이의 주머니 속에서 별 조각들은
이미 서로를 부르며 은은한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별이지만,
그 불완전함조차 조금씩 빛을 더해가는 과정이라는 걸 깨닫게 된 후
아이는 더 이상 어둠에 갇히지 않았다.




희미한 불빛을 좇다

어느새 밤이 깊어질 무렵,
아이는 낯선 언덕 위에서 잔잔한 빛 한 줄기를 발견했다.
마치 누군가 등불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그 빛은 세찬 바람에도 꺼지지 않고,
고요한 파도처럼 언덕을 넘나들고 있었다.


“저 불빛은 뭘까…?”
아이는 무심결에 중얼거리며,
오래전 시계장수정원사를 만났던 때처럼
호기심 섞인 두근거림을 안고 언덕길을 올랐다.


언덕 끝엔 오두막보다 조금 큰, 낡은 창고 같은 건물이 있었다.
그 문 위에 자그마한 표식이 보였는데,
등불과 별의 그림이 겹쳐진 듯한 모양이었다.
문을 열자, 예상치 못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빛을 모으는 창고

창고 안은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수많은 등불로 가득 차 있었다.
큼직한 것부터 손바닥만 한 것까지,
각각 모양도 빛깔도 제각각이었다.
그중 몇몇 등불은 이미 희미해져
언제 꺼질지 모르는 불씨만을 남긴 채 흔들리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서,
허리를 살짝 굽힌 노인이 등불을 조심스럽게 옮기고 있었다.
노인의 옷자락은 오래된 먼지로 가득했지만,
눈빛만큼은 맑게 빛났다.
그는 뒤늦게 아이를 발견하고
낯설지 않은 미소로 말을 건넸다.


“이 밤중에 찾아오다니, 반가운 손님이군.
나는 등불지기라네.
여기 있는 등불들은 모두 누군가의 ‘마음’에서 자라난 빛이야.”


별을 줍는 아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창고 안 등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어떤 빛은 푸르스름했고, 어떤 빛은 노란색이거나 붉은색이었다.
어딘가 희망 같기도, 혹은 두려움 같기도
저마다의 빛이 작은 불꽃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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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의 비밀

“모두… 사람들의 마음에서 온 거라고요?”
아이의 궁금증 어린 질문에, 등불지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군가는 간절한 소망을 품고,
또 누군가는 말 못 할 슬픔 속에서도
자신만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 애쓰지.
이 등불들은 그렇게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는 마음
잠시라도 보듬어주기 위해 모여드는 빛이란다.”


등불지기는 조그만 등불 하나를 가리켰다.
그것은 흔들리는 불길이 거의 꺼져갈 듯 아슬아슬했다.
마치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사그라질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이건, 자신을 전혀 믿지 못하는 누군가의 마음이야.
‘내가 정말로 의미가 있는 사람일까?’
그런 질문에 답을 못 찾아, 끝없이 불안에 떠는 빛이기도 해.”


아이의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어쩌면, 바로 자신의 마음이 그처럼 흔들리고 있진 않을까?
자신의 정체를 몰라 혼란스러워했던 시간들,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했던 순간들이
주머니 속 별 조각들과 함께 스쳐 지나갔다.




별 조각의 불꽃

그때, 아이의 주머니에서 별 조각들이
가볍게 짤랑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조각들이 발산하는 빛이
창고 안의 등불들과 공명이라도 하듯
아주 미세하게 깜박였다.


“오… 자네도 빛을 모으고 있구먼.”
등불지기는 놀란 눈으로 아이의 망과 별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그 별 조각은 ‘네 안의 이름’을 찾아가는 길이겠지.
하지만 마음의 등불 없이,
그 별이 완전히 이어지긴 쉽지 않을 거야.”


아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음의 등불이라니… 그게 뭔가요?”
등불지기는 부드럽게 등을 곧추세우며 설명했다.


마음의 등불이라는 건,
자기 자신을 지탱해 주는 ‘희망의 불씨’를 말한다네.
이미 네 안에도 있지.
다만, 그 불씨를 직접 확인하고 키워갈 의지가 필요하단 말이야.”




불씨를 보듬는 법

등불지기는 한쪽 선반에서 작은 초와 성냥을 꺼냈다.
그리고 아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혹시 지금까지 배워온 것들을 떠올리며,
너 자신의 불씨에 불을 붙여보겠니?
시계장수에게서 배운 시간을 돌보는 법,
정원사에게서 익힌 슬픔을 돌보는 법,
수도자에게서 배운 용서,
서기에게서 배운 진실,
순례자에게서 깨달은 침묵,
악사가 들려준 이름을 부르는 노래까지…
그 모든 것이 네 마음에 깃들어 있을 거야.”


아이는 작은 초를 받아 들고,
온전히 집중해 보려 애썼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생소한 촉감과,
들숨과 함께 차오르는 미세한 긴장감이 뒤섞였다.


‘나는… 정말로 이 불씨를 지켜갈 수 있을까?’
의심이 스치려는 찰나,
아이는 전에 들어본 적 있던 목소리들을 떠올렸다.
‘잊으려 애쓰지 말고, 다시 사랑하기로 결단해야 한다’던 수도자의 말.
‘감정은 울어도 아름다울 수 있다’던 정원사의 미소.
‘침묵 속에서야 비로소 들려오는 소리’라던 순례자의 종소리.


그리고 내 이름을 찾을 용기를 말해주던 악사의 노랫소리….

어느새 아이의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빛이 파르르 몸을 일으켰다.
그것은 주저함과 두려움에 갇힌 불씨가 아니라,
‘그래도 내가 걸어가 보겠다’는 의지의 불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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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빛이 안내하는 길

‘탁—’ 하고 성냥이 그어지는 순간,
어둠을 가르며 작은 불꽃이 살아났다.
아이는 조심스레 초에 불을 옮겼다.
처음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듯 위태로웠지만,
곧 불꽃은 안정된 형태로 잔잔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이의 주머니 안 별 조각들이 그 불꽃을 비추자,
가느다란 빛의 선율이 등불과 어우러져 한층 선명해졌다.
그 순간, 아이는 알 수 있었다.
이 불씨가 곧 내 마음이라는 사실을.


등불지기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아이야.
이제 이 불씨가 약해질 수도, 때론 거의 꺼질 듯 흔들릴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네가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한,
이 등불은 언제든 다시 밝아질 수 있어.
그리고 네 별 조각들은 그런 마음의 빛을 타고
점점 서로에게 다가갈 거란다.”


아이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쩌면 아직 내 이름은 완전히 부를 수 없을지라도,
이 작은 불씨 하나만큼은 내가 지켜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두움을 밝히는 빛

이윽고 등불지기는 아이에게 작은 등잔 하나를 건넸다.
아이가 붙인 초의 불꽃을 등잔 안으로 옮기자,
그 등잔은 아름다운 문양을 그려내며
창고 안에 빛의 그림자를 춤추게 했다.


“가지고 가렴.
네 앞의 길이 아무리 어둡게 보여도,
너는 이미 이 불씨와 함께하잖니.
언젠가 네 이름을 부르게 될 그날까지,
부디 이 빛을 놓치지 말거라.”


아이는 등잔을 꼭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침묵의 순례자’가 건네준 작은 돌,
‘진실을 적는 서기’가 남긴 투명한 잉크,
그리고 지금 이 작은 등불까지…
모두 모여 아이 안에서 또 하나의 길을 만들어 내는 듯했다.




다시 길 위로

등불지기의 창고를 나서자,
언덕 아래로 펼쳐진 어둠이
더 이상 낯설거나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는 어떤 빛
자신을 향해 길을 내어주고 있음을 느꼈다.


주머니 속 별 조각들은 한결 부드러운 기운으로
제각각의 진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별 조각들이 서로를 부를 때마다,
아이는 자기 마음속 등불 역시
가벼운 화음으로 떨리는 느낌을 받았다.


“별은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먼저 줍는 법을 배워야 해.
그리고 부르는 법,
마지막으로 ‘밝히는 법’도 잊지 말아야 하지.”


언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가
밤바람과 함께 귓가에 스쳤다.
아이는 그 소리를 되새기며
언덕길을 내려갔다.
등잔 속 작은 불꽃이
길을 한 뼘씩 밝혀주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여정.
그러나 아이는 알고 있었다.
자신 안에 희미하나마 사그라들지 않는 불씨가 있으며,
그 불씨가 별 조각들을 하나로 이어 줄 힘이 될 거라는 걸.


하늘은 여전히 캄캄했지만,
아이의 발걸음에서는 더 이상 두려움이 묻어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멀리 어딘가에서
또 다른 별빛의 부름
작게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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