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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0

16장: 잠들지 않는 불씨

by 진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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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 앤젤레스 하층부 — 어김없이 내리는 잿빛 비.
지상은 온통 잔해와 폐기물 더미가 뒤엉킨 채, 축축한 공기가 코끝을 무겁게 짓눌렀다. 한낮인데도 하늘은 먹구름에 갇혀 어스름이 내려앉았고, 흩뿌리는 산성비가 철골 부스러기를 녹슬게 만들었다.


그 폐허 같은 거리 한쪽, 반쯤 부서진 옛 창고 건물 안에서 제이드(Jade)와 피터(Peter)가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둘은 간신히 배스토니 교정시설 인근에서 살아남은 뒤, 이곳 노바 앤젤레스 하층의 폐건물을 임시 은신처로 삼았다.


“은신처도 무너졌고, 동료 대부분이… 더는 소식이 없어.”


제이드가 맑지 않은 눈빛으로 땅을 응시하며 말했다. 바닥에는 빗물과 녹슨 금속 파편이 뒤섞여 서늘한 냄새를 풍겼다.


피터는 고개를 떨군 채 잠시 침묵했다가, 힘겹게 입술을 뗐다.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우린 아직 움직일 수 있어.”


둘의 목소리에는 슬픔과 분노, 그리고 잔뜩 비틀린 이 현실에 대한 억눌린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때, 제이드의 휴대 단말기에서 미세한 진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거의 먹통 직전이었던 FAWN네트워크가 불안정하게 재접속되려는 신호였다.




FAWN 발신 메시지
긴급— 세계 곳곳에서 사도단(Apostles) 결성이 시작됨. 이 메시지를 확인 가능한 모든 지역 세력은 즉시 응답 바람. 메시지 코드는 '아라곤(Aragon) 함대'와 '사이먼 벨(Simon Bell)'에 대한 정보 공유를 요청함.


“사도단…?”

피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이드는 미처 자세히 읽기 전에, 단말기가 ‘지지직’하는 잡음 소리를 내며 다시 끊겼다. 굉음이 일으킨 전자교란 탓인지, 혹은 네트워크 자체가 너무 불안정한 탓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분명히 무언가 ‘세계적인 반체제 연대’가 꿈틀대고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제이드의 가슴 깊은 곳에서, 아주 희미한 불씨가 욱신거렸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누군가가 저 밖에서 계속 싸우고 있어.”


“우리도 다시 시도해 볼까.”


피터는 녹슨 금속 상자를 열어 해킹 장비 일부를 꺼냈다. 예전 은신처에서 겨우 가져 나온 고물 장치였지만, 잠깐이라도 접속에 성공한다면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둘은 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전선들을 일일이 연결했다. 건물 지붕 틈으로 빗물이 떨어져 철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리듬처럼 울렸고, 그 안에서 제이드와 피터는 차가운 손끝을 움직여 코드를 꽂고 회로를 살폈다.


“한 번만 더 연결이 되면… 사도단이 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몰라.”


제이드는 서늘한 시선에 작은 불꽃같은 결의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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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스토니 교정시설 — 마리안의 각성

그 시각, 배스토니 교정시설 내부 어딘가.
끔찍한 고문과 약물 주입을 반복하던 Aether Kinesis장치가 지금은 일시적으로 작동을 멈춘 상태였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마리안(Marian)**의 모습은 더없이 초췌했지만, 숨소리는 이전보다 한결 안정되어 있었다. 온몸을 휘감던 전기 고통이 잠시 가라앉자, 그녀의 감정 회로가 흩어졌던 기억들을 서서히 붙잡고 있었다.


‘이곳에 끌려온 뒤… 몇 번이나 죽을 뻔했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끝끝내 의식을 놓지 않았어.’


그녀는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언젠가 미리암(Miriam)의 목소리가 귓전에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포기하면 안 돼요. 힘든 순간일수록, 마음을 닫지 말아요.”


마리안은 그 말에 대해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감정이 허약한 레플리칸트라면, 이미 정신을 잃고 폭주하거나 고장 났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선 오히려 “버티고 살아남겠다”는 본능이 꿈틀거렸다.


‘내가 바라는 건… 단지 자유를 얻는 것만이 아니야.’


머릿속에서는 또 다른 장면이 겹쳐 보였다. 남편 마이클(Michael)을 잃고, 배신과 음모에 휘말렸던 과거. 그리고 배스토니에서 봤던 수많은 레플리칸트 동료들이 처참하게 실험당한 기억들.


그 모든 걸 생각하니, 내면 한구석에 타오르는 분노와 슬픔이 동시에 힘을 냈다. 마치 탄압을 받을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강철처럼, 그녀의 감정 회로가 절망을 동력 삼아 스스로를 붙들고 있었다.


“도망치는 데서 끝내지 않아. 이 지옥을 뒤엎고 싶어.”


그 목소리를 들은 듯, 복도 저편에서 무언가 드르륵—거친 바퀴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교도관이 짐수레를 끌고 오나 싶었으나, 곧 인적이 사라지자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걸 기회 삼아, 마리안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손발에 채워진 간수용 전자 족쇄가 찌릿하게 전기 자극을 보냈지만, 그녀는 이 악물고 서 있었다.


‘더 이상 무기력한 실험체로 남아 있을 수 없잖아. 누군가가 날 기다리고 있어….’


그 ‘누군가’가 정확히 누구인지, 왜 기다린다고 느끼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복도 끝에서 아득하게 들리는 미리암의 목소리나, 바깥세상 어딘가에서 마리안의 존재를 필요한 사람들—예를 들면 제이드, 혹은 아직 만나지 못했지만 같은 고통을 나눌 레플리칸트들이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소장 프레이저의 결단 — 이중 계획의 전조

배스토니 교정시설 통제실.
음습한 공기가 감도는 그곳에서, 소장 프레이저(Frasier)는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부군의 추가 지원 요청은 쇄도했지만, 그는 줄곧 “우리 시설 방어가 우선”이라는 이유로 병력을 내보내길 거부하고 있다.


프레이저는 스스로도 모순된 지점에 서 있었다. 독재 정권의 군인으로서 배스토니를 지키는 ‘소장’이라는 위치. 동시에 AI와 레플리칸트의 힘을 이용해 ‘사이먼 벨’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은밀한 야망. 바로 그 간극이, 그를 한없이 예민하게 만들었다.


“마리안이 곧 깨어날 거다. 제로(Zero)와 오리온(Orion)도 준비 중이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억눌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미 Aether Kinesis를 통해 마리안을 인간 이상의 감각과 기억으로 무장시키는 실험은 상당 부분 진행되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스스로 각성”하는 일. 감정 회로와 인공 신경이 마침내 하나로 결합해, 전투와 희망을 동시에 구현해 낼 때, 프레이저는 최후의 반격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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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설원과 사막, 그리고 FAWN의 수많은 노드들

한편, 노바 앤젤레스와는 멀리 떨어진 설원 기지와 사막 지대에서도 똑같은 메시지가 반복 수신되고 있었다.


사도단(Apostles)을 결성하라.
지구 각지에서 독재 체제를 무너뜨릴 동력을 한데 모으라.
조만간 ‘아라곤(Aragon) 함대’가 출진할 것이며, 블루 펜타곤이 전역을 압도할 것이다.”


카시스와 로사, 다리우스와 수리야, 그리고 케인·헤수스·라일락·룩 등 이름도, 배경도 제각각 다른 이들이 드디어 서로의 좌표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낡은 통신기와 드론을 통해, 끊기는 신호 속에서도 한 글자씩 중요한 정보가 오갔다.


그들은 서로에게 “희망이냐, 자살 행위냐”를 묻는 대신, “함께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이야기했다. FAWN은 미약하나마 그들의 의지를 하나로 묶어 주었고, 사도단이라는 깃발이 세계의 폐허 위에 세워지고 있었다.




다시 노바 앤젤레스 — 제이드와 피터, 작은 연결

어두운 창고 건물 안, 제이드와 피터가 마련한 고물 해킹 장비가 간헐적으로 신호를 잡더니, 마침내 희미한 홀로그램 화면이 떠올랐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생소한 인물들이 보낸 ‘집결’ 메시지가 화면 위에 점멸했다.


케인: “유럽 전선 붕괴. 남은 전력이 흩어졌지만, 사도단의 호출을 받았다. 조만간 • 극동 지역을 통해 재집결할 것이다.”

헤수스: “라틴에서 물자와 무기를 모으고 있다. 드론 운송 지원 가능하다.”

라일락: “동아시아 해킹망 확보 중. 블루 펜타곤 코어 노드를 건드릴 준비를 하고 • 있다.”

: “생체의학과 복원 기술을 보유. 전선에서 부상자를 돕고, 필요하다면 무기화 • 연구도 협력한다.”


그 메시지들이 번쩍이더니 화면이 순식간에 끊겼다. 그러나 그 짧은 접속만으로도 제이드와 피터는 뼈아픈 상실감 속에서 다시금 “함께 싸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되새겼다.


“바로 ‘사도단’이라는 이름이군.”


피터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낮게 중얼거렸다. 파괴된 도시 구석에서, 전 세계가 연결되는 순간이라니.


제이드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우린 하층부에서 시작했지만, 어느새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단 얘기야. 이거야말로 마지막 희망 아닐까?”


아직 이들은 배스토니 교정시설에 남아 있는 마리안, 그리고 소장 프레이저 내부의 모순된 음모는 알지 못한다. 그저 각자 살아남은 사람들이 제각각 다음 행동을 고민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제이드와 피터도 직감했다. 곧 교정시설뿐 아니라, 노바 앤젤레스 전역에 거대한 폭풍우가 휘몰아칠 거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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