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자신을 비추는 호수
별을 줍는 아이는 등불지기와 헤어진 뒤,
언덕을 넘어 어느 고즈넉한 숲길에 들어섰다.
작은 등잔 속 불빛은 여전히 흔들리며
아이 앞의 길을 성실히 밝혀주었다.
주머니 속 별 조각들은 차분하면서도
어딘가 새로운 기대에 차오른 듯,
가볍게 서로를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냈다.
물소리가 부르는 길
어둠을 헤치고 걷는 동안,
아이의 귀에는 잔잔한 물소리가 점점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와 섞여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점차 가까워질수록 호수가 있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딘가 물가가 있나 봐.”
아이의 마음에 실낱 같은 호기심이 일었다.
등불과 별 조각이 안내하는 듯, 숲 길을 헤치고 나아가자
눈앞에 잔잔한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별빛과 달빛이 물결 위로 은은하게 스며들어,
마치 하늘과 물이 맞닿은 듯한 몽환적인 풍경이었다.
호수가 품은 그림자
호숫가에 가까이 다가선 순간,
아이의 시선은 물가에 쪼그려 앉아 있는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낡은 여행자 차림을 한 그 사람은,
자신의 옆에 등을 세워 두고
손끝으로 호수의 물결을 살며시 만져보고 있었다.
아이를 느낀 듯, 그 사람은 뒤를 돌아보았다.
거친 얼굴선에는 피곤함이 서려 있었지만,
눈동자만은 유독 맑았다.
그는 아이를 반갑게 맞이하며, 조용히 손짓으로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안녕, 아이야.
난 이 호수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물의 순례자라고 해.
이렇게 밤마다 호숫물을 만지고,
그 물결에 내 그림자를 살짝 씻어내곤 하지.”
아이의 마음에 문득 설렘이 일었다.
‘물의 순례자’—그가 누구이든, 이곳에선 무엇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어렴풋이 드러나는 얼굴
물의 순례자는 아이에게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더니,
가만히 호수 위를 가리켰다.
잔잔한 호수 표면에는 아이와 순례자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는데,
흐릿한 달빛 덕분에 뚜렷하진 않지만
분명히 서로 다른 두 그림자가 나란히 겹쳐 보였다.
“이 호수는 거울과도 같아.
하지만 진짜 거울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물에 비치는 상(像)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감추고 싶어 하는 마음’까지 아련히 비춰주곤 한다는 거지.”
물의 순례자는 손바닥으로 물결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그러자 아이의 모습이 물결 따라 흐릿하게 흔들렸다.
언뜻 보기에 ‘아이의 얼굴’ 같았지만,
동시에 전혀 모르는 누군가의 눈동자 같은 형상이 언뜻 비쳐 지나갔다.
아이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거… 혹시 제 안에 있는 또 다른 모습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내면에 감춰둔 진짜 얼굴이거나,
네가 언젠가 될 모습일 수도 있어.”
물의 순례자는 미소를 머금고 다시 물길을 멈췄다.
물에 깃든 대화
아이는 호숫가에 앉아,
자신의 작고 밝은 등잔을 물가에 비춰보았다.
그러자 등잔 불빛이 호수를 파고들며
은은한 빛무늬를 물속 여기저기에 새겼다.
주머니 속 별 조각들은 그 장면에 호응이라도 하듯
가벼운 떨림으로 화답했다.
“지금 네가 보는 물결은,
사실 네 안의 목소리를 반사하는 거야.”
물의 순례자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용서를 심던 수도자에게서 배운 건 뭐였니?
잊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면서도 다시 사랑하기…
그 가르침은 결국 내면의 그림자를 외면하지 않는 힘을 의미하거든.
이 호수가 네 그림자를 비추듯,
네 마음속 어둠도 함께 보듬어주어야
비로소 별이 제대로 빛날 수 있게 될 거야.”
아이의 머릿속에는,
그동안 스쳐갔던 만남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고요, 슬픔, 용서, 진실, 침묵, 노래, 등불…
그 모든 배움이 마치 한데 모여
호수 위에 새겨지는 별빛의 흔적 같았다.
자기 자신과의 마주침
아이의 시선이 호수 속 자신의 흔들리는 모습을 따라가자,
어느새 물결 위 아이의 그림자는
입술을 움직여 속삭이는 듯한 형상을 만들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이는 그 침묵의 말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너는 누구니…?’
언제나처럼, 자신에게 던져지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두렵지 않았다.
아이의 마음속 등불이 이제는
이 물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아이는 손가락으로 살짝 물결을 건드렸다.
순간, 희미한 파문이 번지며
물속의 자신이 부서졌다가 다시금 이어졌다.
바로 그때, 주머니 속 별 조각들이
투명한 빛을 발하며 반짝 울려 퍼졌다.
별빛과 물빛의 공명
물의 순례자는 조용히 그 장면을 지켜봤다.
그리고는 아이가 흔들리는 물 위에 손을 대고
사색에 잠긴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모든 것은 결국 흐르지.
물은 고여 있으면 썩기 마련이고,
빛도 흐르지 않으면 꺼져버리거든.
네가 ‘내 이름’을 찾게 되면,
그건 멈춘 정체성이 아니라
더 넓게 흐르는 길이 될 거야.”
아이는 그 말이 한 번에 이해되진 않았지만,
왠지 모를 환희가 가슴 한편에서 차올랐다.
이 호수에 비친 ‘나’는 그저 하나의 모습일 뿐,
언젠가 계속해서 변하고 흘러갈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와 헤어지며
물의 순례자는 불현듯 일어나,
자신의 등을 챙겨 어깨에 둘렀다.
호수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아이를 향해
잔잔한 목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자네는 이 호수에 다시 와도 되고,
그냥 지나쳐도 괜찮아.
언젠가 자신을 더 또렷하게 마주해야 할 때,
여기가 좋은 거울이 되어줄 거야.”
아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목소리를 내었다.
“고마워요. 다음에, 정말 제가 누군지 알고 싶어질 때…
다시 오고 싶어요.”
물의 순례자는 빙긋 웃더니,
호수 위로 잠깐 시선을 보내곤 천천히 숲 속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아이는 한동안 호숫가에 앉아
자신의 등잔과 물결 속 그림자를 번갈아 지켜보았다.
‘나 자신을 더 또렷이 마주해야 할 때…
과연 그때, 난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될까?’
파문이 가라앉은 호수 위에는
아이의 흔들리는 그림자만 고요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이의 마음은
등불과 별 조각이 일으키는 빛의 공명으로
더 깊은 곳까지 환해진 듯 느껴졌다.
그리하여 별을 줍는 아이는
또 한 번 자신의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바람은 조용했지만, 호수의 물결이 만들어내는 숨소리 같은 파동과
아이의 작은 등불, 그리고 주머니 속 별 조각들이
서로에게 화답하며 어둠 속에 또 하나의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어쩌면, 이 물결 위에 비친 얼굴 또한
아직 완성되지 않은 별의 조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는
그 조각들까지 품어 안은 채로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부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고,
다시금 길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