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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별들이 지나는 길

8. 별거울 속의 기억

by 진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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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무렵, 은별이와 도윤이는 바닷가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이미 여러 날 함께 바다를 거닐었지만, 매번 다른 풍경이 찾아오는 듯했다.
오늘은 머리카락을 살짝 흔드는 바닷바람이, 어쩐지 한층 부드럽고 따뜻했다.


“은별아, 어젯밤에 피리는 좀 불어봤어?”
도윤이가 조심스레 묻자, 은별이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응. 엄마 자장가를 기억하려고 노력했는데… 아직은 조금씩밖에 안 떠올라.
그래도 괜찮아. 그 소리 자체가 기분 좋았거든.”


도윤이는 괜히 안심한 듯, 모래사장을 걷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난 너의 노래가 완성될 날이 기다려져. 꼭 들을 수 있으면 좋겠어.”


두 사람은 그리 길지 않은 대화를 나누고 나서,
서로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하늘엔 분홍빛과 금빛이 어우러진 노을이 깔렸다.
그리고 그 색깔들이 차분히 식어갈 때, 어둠 속에서 하나둘 별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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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마당에서, 조개피리가 울리다


오두막으로 돌아오니, 윤 노인은 이미 흔들의자에 앉아 달빛을 즐기고 있었다.
은별이는 조개피리를 꺼내 들고 할아버지 곁으로 갔다.


“할아버지, 오늘은 조금 연습을 해 봤어요.”
그렇게 말한 은별이가 피리에 조심스레 바람을 불어넣자,
낮게 흔들리는 음정과 함께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직은 어설픈 음색이었지만, 윤 노인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게는 아주 고운 소리로 들리는데? 아마 달빛도 그렇게 느낄 게야.”


도윤이는 옆에서 “우와!” 하고 작게 탄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은별이는 쑥스러운 듯 웃음을 터뜨리며 피리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오늘은… 할아버지께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지 궁금해요.”
노을빛이 가라앉고, 부드러운 달빛이 마당을 환하게 비출 즈음, 은별이가 조용히 물었다.


윤 노인은 살짝 허리를 곧추세우고,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의자를 돌렸다.
“그럼… 오늘은 ‘별거울 속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까 한다.
어쩌면 너의 ‘잃어버린 자장가’도, 이 이야기와 닮아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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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잃어버린 얼굴을 비추던 별거울


아주 먼 옛날, 이름 없는 산골 마을에 리엘이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어.
그 아이는 어릴 적 부모님을 잃었고, 부모님의 모습은 물론 목소리도 거의 기억하지 못했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떤 별이 반짝일 때마다 가슴 깊숙이 따뜻한 감정이 올라오곤 했어.
마치 오래전에 지켜봤던 누군가의 웃음처럼 말이야.


어느 저녁, 리엘이는 마을 언덕 위에 앉아 별을 올려다보고 있었어.
그날 밤 따라, 별들 사이에 유독 크고 밝게 빛나는 별이 하나 있었거든.
그러다 문득, 어디서 낮고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 별에 네가 잃어버린 얼굴이 비칠지도 몰라.”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어.
대신, 밤바람이 수풀 사이를 헤치며 조용히 지나갔다.
리엘이는 직감적으로 그 말이 틀린 게 아닐 수 있다고 느꼈어.
그래서 그 별을 향해 조용히 빌었단다.



“내가 잊어버린 얼굴, 잊어버린 목소리… 한 번이라도 다시 볼 수 있다면 좋겠어.”



며칠 후, 리엘이는 우연히 숲 속 연못가에 도달했는데,
그곳은 달빛과 별빛이 고요히 물 위를 수놓고 있었지.
밤바람이 잔물결을 일으키자, 그 반짝임이 마치 살아 있는 별처럼 보였단다.


리엘이는 문득, 연못 위 별빛 사이에서 아주 흐릿한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어.
처음엔 물결에 일렁이는 단순한 그림자처럼 보였지만,
계속 들여다보니 이상하게도 사람의 얼굴 같았지.
그리고 그 모습이 어쩐지 따뜻하고 익숙하게 느껴졌어.


“이게 혹시, 내가 잊어버린 사람…?”
리엘이가 속삭이자, 연못 위 별거울 같은 물결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순간, 그 얼굴이 노랫소리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사라져버렸지.


그날 밤, 리엘이는 오두막으로 돌아와 스케치북에 그 흐릿한 모습을 그려보려 했어.
그리고 그림을 그리며 눈물을 흘렸다.
부모님의 얼굴이라고 확신한 건 아니지만,
그 미소가 너무나 따뜻했고, 마치 ‘괜찮다’고 말해 주는 듯했거든.


며칠 뒤, 리엘이는 밤마다 연못가로 가서 별빛을 바라보곤 했어.
그리고 잔물결 위에 비친 얼굴에 조심스레 말을 걸었단다.
“나는 잊지 않았어. 혹시 내가 잊었다고 해도,
지금 이렇게 보이는 걸 보니, 당신은 여전히 내 곁에 있나 봐.”


그러자 그날부터 리엘이의 꿈속에는
따뜻한 노랫소리가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어.
마치 그 얼굴의 주인공이 남긴 메아리처럼,
한 구절 한 구절 마음을 두드리곤 했지.


그래서 사람들은 그 연못을 ‘별거울’이라 부르며,
잊힌 기억을 되찾고 싶은 이들이 찾아온다고 전해 내려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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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노인의 이야기가 끝나고


오두막 마당엔 은은한 달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은별이는 이야기에 빠져있다가 조용히 시선을 들었다.
파도는 어느새 잦아들었고, 바람은 부드러운 숨결처럼 귓가를 스치고 있었다.


“할아버지… 리엘이가 연못에서 본 그 얼굴처럼,
저도 언젠가 엄마의 얼굴을 이렇게 또렷이 떠올릴 수 있을까요?”


윤 노인은 흔들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마당가 작은 물웅덩이 쪽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모여 작은 거울같이 반짝이는 그 웅덩이 위에,
은별이와 윤 노인의 그림자가 조용히 나란히 서 있었다.


“물은 늘 흐르고, 바람은 늘 지나가지.
그러다가도 언젠가 잠시 멈춘 순간에는,
그 물 위에 우리가 잊었던 얼굴이나 기억이 또렷이 비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바람에 몸을 맡기되,
너무 서둘러 간직하려 애쓰진 말거라.
기억은 우리가 놓쳤다고 생각할 때,
어느 새벽이나 어느 달빛 아래,
불쑥 돌아오기도 한단다.”


은별이는 작게 숨을 고르며 그 말을 곱씹었다.
어쩌면 자신의 노래도, 잊었다고 생각하던 엄마의 얼굴도,
이렇게 서서히 되살아날 수 있음을 조금씩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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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은별이는 조개피리를 입에 댄 채,
한 번 더 숨을 불어넣었다.
비록 아직은 불완전한 멜로디였지만,
파도 소리에 살짝 섞여 들리는 피리 음색이 아늑하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은별이는 연못 대신 작은 웅덩이 위에 비친 달빛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모습이 일렁이면서도,
언젠가 엄마가 웃으며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던 장면이
아주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엄마…”
소리는 작게 새어나왔지만,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그 순간 바람이 솔솔 불어와, 은별이의 머리카락과 조개피리 주위를 감싸듯 휘돌았다.


윤 노인은 멀리 바다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달빛 아래 부드럽게 흔들리는 파도에는,
또 다른 별거울이 되어줄 수 있는 잔물결들이 총총히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는 저 파도 위를 바라보며
오래 잊어버렸던 소중한 얼굴을 다시금 마주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또 밤이 깊어갔다.
바람은 여전히 잔잔했고,
별들은 여전히 따뜻한 눈길로 오두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은별이의 마음 어딘가에선,
엄마의 자장가가 조금씩 완성될 날을 기다리며
작은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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