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신학적 접근
삼위일체 대축일 강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심장부, 곧 삼위일체의 신비를 기념합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으로 영원히 계신다.” 이 고백은 단순한 추상 명제가 아니라, 우리 존재와 구원의 실제적 토대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신학, 물리학, 수학, 심리학, 역사, 종교심리학, 역사신학, 복소수 체계, 양자역학이라는 아홉 개의 창을 통해 이 신비를 들여다보고, 교정사목 현장과 우리의 일상에 어떤 희망과 결단을 요청하는지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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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학 ― “사랑이신 하느님”
요한 1서 4,8은 하느님을 “사랑”이라고 선포합니다. 사랑은 ‘나’만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주체와 대상, 그리고 그 사랑을 잇는 일치를 낳는 생기가 필요합니다. 성부는 사랑의 근원, 성자는 사랑을 받아 다시 돌려드리며, 성령은 둘 사이에 생동하는 사랑 자체로서 공동체를 완성합니다. 삼위일체는 ‘분리된 세 분’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의 가장 깊은 본질은 ‘관계적 사랑’이며, 우리의 구원은 그 사랑 안에 참여하도록 초대받는 것입니다.
2. 물리학 ― 빛의 삼중성
현대 물리학은 빛을 세 가지로 묘사합니다: 전자기파로서의 파동, 입자로서의 광자, 그리고 우주를 채우는 에너지 장. 세 특성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고, 하나의 빛이 상황에 따라 다른 양상을 드러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구원사 내에서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상호 호응적 ‘양상’을 드러내십니다. 삼위일체는 “세 개”가 아니라 “한 빛의 세 얼굴”입니다.
3. 수학 ― “1 × 1 × 1 = 1”
초등수학의 곱셈 법칙은 우리에게 간명한 비유를 줍니다. 1을 아무리 세 번 곱해도 결과는 1입니다. 덧셈(1+1+1)으로는 3이 되지만, 곱셈(1×1×1)은 1의 일치를 지킵니다. 곱셈이 성부·성자·성령의 내적 침투(perichorēsis)를 근사(近似)적으로 보여 준다면, 덧셈은 외적 구별을 상기시킵니다. 두 관점이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삼위이면서 일체”라는 역설적 고백을 이해의 지평에 올려놓을 수 있습니다.
4. 심리학 ― 관계적 자아와 정체성
현대 심리학은 인간의 자아를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관계적 자아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너”를 통해 “나”를 깨닫습니다. 삼위일체의 ‘관계적 하느님’은 우리의 정체성이 타인과 하느님 안에서 성숙한다는 진리를 비춥니다. 교정시설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도, 수감자·교도관·사목자는 상호 존중과 공감 속에서 ‘새로운 나’를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사랑이 이 재창조 과정의 모델입니다.
5. 역사 ― 공의회의 여정
교회는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자는 성부와 한 본체”임을,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성령도 같은 영광을 받는다”는 신앙을 천명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결코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교리가 아닙니다. 수 세기에 걸친 기도, 논쟁, 순교의 피를 통해 정련(精鍊)된, 교회의 살아 있는 기억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 고백 역시 교부들의 어깨 위에 서 있습니다.
6. 종교심리학 ― 체험으로서의 신비
신비는 이론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감옥이라는 경계 상황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절실히 체험한 많은 이들이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고 고백합니다. 성부의 자비, 성자의 연대, 성령의 위로가 그들의 상처 난 정체성을 치유합니다. 삼위일체 경험은 상호성·공동선·용서의 심리 역학을 활성화하여, 내면의 ‘감옥 문’도 열어 줍니다.
7. 역사신학 ― 아우구스티노와 카파도키아 교부
아우구스티노는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사랑 자체”라는 삼분법으로,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한 본질(ousia), 세 위격(hypostaseis)”이라는 언어로 삼위일체를 설명했습니다.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 속 두 전통은 한 목소리로 “하느님은 관계적 사랑”임을 선포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언어‧문화‧경계를 넘어서는 ‘포용적 친교’를 요구합니다.
8. 복소수 체계 ― 실수와 허수의 일치
복소수 z = a + bi에서 a는 실수축, bi는 허수축, 그리고 두 성분이 이루는 평면은 실수선보다 넓은 ‘완전한’ 수 체계입니다. 삼위일체도 마찬가지로, 성부·성자·성령이 함께할 때 하느님의 ‘완전한 장(場)’이 열립니다. 실수와 허수가 구분되지만 동일한 수(z)에 통합되듯, 삼위는 서로를 포괄하며 하느님 전체를 드러냅니다.
9. 양자역학 ― 얽힘(Entanglement)의 은유
얽힘된 입자들은 물리적 거리를 넘어 동시에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삼위일체의 위격 역시 공간·시간의 제한 없이 ‘초월적 얽힘’을 이룹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요한 14,11) 계심을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 얽힘에 참여시켜, “당신들이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게 될 것”(요한 13,35)이라 약속하십니다. 사랑은 영적 얽힘의 실험적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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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삼위일체 사랑을 ‘살아내기’
1. 관계 회복
성부의 창조적 자비를 본받아, 배제된 이를 먼저 찾아가십시오. 용서의 물꼬를 트는 사람이 삼위일체의 기쁨에 참여합니다.
2. 그리스도의 연대
성자는 죄수와 죄인을 위해 스스로 ‘죄수’가 되셨습니다(필리 2,6‒8). 우리도 벽 안팎의 편견을 넘어, 고통받는 이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3. 성령의 창조성
성령은 혼돈 위에 살이셨고, 지금도 새로운 질서를 잉태하십니다. 작은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 마십시오—책 읽기 모임, 예술 작업, 심리 치유 프로그램 등 창의적 사목은 성령의 숨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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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의 말씀
형제자매 여러분,
삼위일체는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가슴으로, 가슴으로 느끼기 전에 삶으로 선포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미사를 마치고 세상에 나아갈 때, 사랑의 관계를 ‘재현’하는 살아 있는 성사가 됩시다. 얽힘된 입자처럼, 우리의 말과 행동이 멀리 있는 형제에게도 동시에 울림을 주기를, 복소수 평면처럼 현실과 보이지 않는 차원을 하나로 잇는 삶이 되기를, 빛처럼 어둠 속에서도 분리되지 않는 일치를 드러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아멘.